영화감독 허진호, 무대선 생초짜! 배우·스태프에 '기초문법' 배워

'낮잠'으로 첫 연극 연출…요양원에서 만난 첫사랑
노년의 설렘 웃음·감동 세트…"배우와 소통하는 방법 배웠다"
혼자 가슴앓이만 했던 첫사랑은 닿을 수 없는 별이다. 연극 '낮잠'의 남주인공 한영진에게도 마찬가지다. 고교 시절 옆 여고의 '퀸카' 이선은 짝사랑만으로도 좋았다. 그런데 수십년이 지나 백발이 성성해져서야 기회가 찾아온다.

대신 문제가 있다. 영진은 요실금으로 기저귀를 차고 다니는 노인이 됐다. 똥냄새가 난다고 타박당하면 "은행 냄새야"라고 비굴하게 둘러대는 처지다. 얼굴도 예쁜데다 시도 잘 읊어 왕년에는 온 동네 남학생들의 애간장을 녹였던 이선의 상황도 난감하긴 매한가지.치매에 걸린 이선은 영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뿐더러 흙 묻은 박하사탕도 마구 주워먹는 할머니가 돼버렸다. 노인 요양원에서 영 아름답지 못한 몰골로 재회한 두 남녀.그럼에도 생애 마지막 사랑은 피어난다. 영화감독 허진호씨(47)는 첫 연극 연출작 '낮잠'에서 설익고 풋내나던 첫사랑이 다시 찾아든 노년의 설렘을 그려냈다. 최근 서울 백암아트홀에서 만난 허씨는 "어린 시절 그 예쁘고 아름다운 나이에 경험한 첫사랑은 보석같다"면서 "추억하면 삶이 참 풍요로워지고 즐거워지는 순간을 다시 경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호우시절''외출''봄날은 간다''8월의 크리스마스' 등의 영화로 관객들에게 사랑받아온 그에게 연극 연출은 처음이다.

그는 연극과 영화의 차이에 대해 "영화는 감독이 선택한 순간을 보여준다면 연극은 매번 새롭게 관객을 만난다"고 짚었다. 특히 배우들의 역할이 중요한 장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영진 역을 맡은 배우 세 명이 각기 다르게 연기하기에 세 배로 힘들긴 했지만 그만큼 재미있었다는 것."제가 배우들에게 감정 처리는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주문은 할 수 있지요. 하지만 막상 배우가 관객들과 소통하면서 새롭게 감정을 가져갈 수도 있고 아예 다른 감정으로 처리할 수도 있더군요. 그런 게 새로웠어요. 순간 잡아낸 장면을 똑같이 재현하는 영화와 다른 부분이죠.연극은 오랜 시간을 들여 연습하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서 편집하는 기분이랄까요. "

첫 연극 연출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는 배우와 스태프들의 도움으로 연극의 '문법'을 공부했다. 영화에서는 할 수 없는,연극에서만 가능한 연출을 해본 일도 흡족하다고.특히 무대 앞에는 현실,무대 안쪽 배경막 너머로 과거 회상을 동시에 배치했던 연출이 좋았다고 한다.

허씨는 "연극 연출을 통해 배우와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다"면서 "그 순간을 중요하게 여겨 리허설을 많이 안하는 감독 중 하나였는데,(연극처럼) 연습을 충분히 하고 촬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전했다. 그는 "좀더 공부를 하고 연출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들었고 기회가 되면 다시 도전해볼 용의도 있다"고 덧붙였다. 연극은 사랑의 감성을 잔잔하게 보여준다. 영진 역은 이영하,김창완,오광록씨가 맡았다. 3월28일까지 서울 백암아트홀.4만~5만원.(02)764-7858~9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