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막걸리 르네상스의 이유

며칠 전 대학 동창 몇몇이 모여 막걸리를 마시면서 막걸리 이야기를 했다. 야간 통행금지 시간이 자정으로 정해져 있던 시절이라 막걸리를 마시며 이른바 '개똥철학'을 논하다 보면 곧잘 술집에서 밤을 새고 곧장 등교할 수밖에 없었던 일부터,전날 수업시간표에 맞춰져 있는 가방을 다시 들고 가 대강 시간을 때우다 교수님께 야단맞던 일,2교시 수업이 끝나갈 무렵이면 교복에 떨어져 있던 막걸리가 마르면서 이곳 저곳 허연 얼룩들이 나타나는 통에 비비고 또 비벼서 지우느라 애를 먹었던 일 등등 기억들을 더듬어 갔다.

그리고 나처럼 재학 중 군생활을 한 친구들이 복학했을 때,재학생들이 마시는 술이 소주로 바뀌어 있는 통에 곤혹스러워했던 기억을 꺼냈다. 막걸리와 막걸리 마시는 습성에 길들여져 있던 친구들이라,소주를 막걸리 마시듯 했다가 실수한 이야기들이었다. 후배 등에 엎혀가 여관 신세를 진 경우는 그래도 점잖은 편이고,집 대문 앞에서 쓰러져 잠들었다가 다행히 어머니에게 발견된 경우,심지어는 만원버스 안에서 불편한 속을 어쩌지 못해 대망신을 당했던 일까지 있었다. 나는 집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가 끝내 종점 파출소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던 경우였다. 왜 술이 순한 막걸리에서 독한 소주로 바뀐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따라나왔다. 사실 소주란 세상을 참으로 독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지게꾼이나 넝마주이 같은 사람들이 '됫병술'을 사다가 '소주잔'이 아닌 '대글라스'에 따라 단숨에 마시고 취해 떨어지는 술이었다. 그런 술을 일반인,특히 젊은이들이 즐겨 마시는게 됐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생각해 보았더니 그러니까, 그때가 1970년대 초,'유신시대'의 막이 열리던 시절이었다.

이야기는 30여년 만에 왜 다시 막걸리의 시대가 온 것인가로 이어졌다. 한 친구가 말했다. 마구 걸러서 마구 마실 수 있어서 막걸리 아닌가? 그러니까 누구 눈치 안 보고 말을 마구 할 수 있는 자리에 어울리는 술이지. 안 그래? 세상이 좋아졌다는 반증이야. 다른 친구가 거들었다. 맞아! 소주시대 이전까진 그래도 말을 함부로 할 수 있었어. 사람들이 시간 들여 돈 들여 모여서 술을 마시는 이유가 뭐겠어? 말을 나누자는 데 있잖아! 그것도 될 수 있으면 오랫동안 말이지. 누군가 나섰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솔직해진 측면도 있어. 괜히 없는 폼 잡을 필요 없다는 거지. 인터넷 있잖아? 얼굴 드러내지 않고 내키는 말을 하잖아. 솔직해진 데는 그 덕도 있어.

나는 친구들 말이 그럴듯해서 머리를 주억거렸다. 돌이켜보니 그 30여년 사이에 소주를 하급주로 여겨 노동현장에서도 맥주만 찾던 시절이 잠시 있었다. 그 시절은 과도기였던가 했다. 아무튼 이제 경제까지 좋아져 친구들과 자주 어울려,막걸리를 마구 마시면서 말을 마구 나눌 수 있는 시기가 빨리 왔으면 싶었다. 가능하다면 그때마다 대학시절처럼 책을 많이 읽어 '개똥철학'을 논하면서 밤을 새워봤으면 했다.

이상문 제지공업연합회 이사장·소설가 kpma@pap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