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12·12때 전두환에 강한 불만…보름만에 신군부 사실상 묵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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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외교문서 공개미국은 12 · 12 사태 직후 신군부에 대해 극도의 불만을 표시하며 반발했다가 보름이 지나자 신군부를 사실상 묵인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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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미국의 입장을 공식 대변하는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12 · 12 사태 이후 최규하 대통령(13일)과 전두환 보안사령관(14일),박동진 외무장관을 만나 미국 측의 강력한 유감과 불만을 표시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신군부가 작전통제권 행사와 관련한 한 · 미 간의 합의를 위반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한 데 대해 백악관과 군부의 강한 불만을 전달하고 향후 민간정부를 전폭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19일 박 외무장관을 면담한 자리에서 "한국군이 미국 측과의 협의를 완전히 무시하고 대대와 사단병력을 자의로 이동해 한 · 미 연합군의 군사적 유효성과 행동의 자유를 지극히 훼손했다"며 "연합사의 작전통제권 위반 및 위계질서의 문란은 놀라울 정도"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미국 군부는 극도의 불만을 표시하고 있고 이러한 불만은 주한미군 사령관으로부터 미합참의장을 거쳐 백악관의 최고위층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것"이라며 "미국 정부로서는 어디까지나 한국의 민간 정부와 상대할 것이며 한국의 민간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쿠데타를 주도한 전두환 사령관에게도 이 같은 미국의 의견을 '확고하고 솔직하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9일이 지난 28일 다시 박 장관을 면담한 글라이스틴 대사는 "군부 지도자들에 대해 그들을 배척하거나 경원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며 톤을 낮췄다.
외교가에서는 미국이 12 · 12 사태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군이 신군부를 중심으로 안정화되고 이들이 특별한 정치적 동기를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해 신군부의 등장을 결과적으로 용인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후 1999년 출간한 회고록 '광범한 개입,제한된 영향력;위기의 카터 행정부와 한국'에서 자신의 당시 판단이 잘못됐음을 사실상 인정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12 · 12 쿠데타 이후 당시 전두환 장군이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했지만 결국 거짓말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이 문서에서 휘류빈 소련 외무차관은 1979년 10월29일 모스크바에서 우어모도 주소련 일본 대사를 면담한 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 "박 대통령은 미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중앙정보부(KCIA) 부장에게 살해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박정희 정부와 지미 카터 미 행정부는 1979년 6월 서울에서 열린 한 · 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주한 미 지상군 철수와 한국 인권,유신체제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겪은 것으로 드러났다.
박정희 정부는 카터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주한미군 철수를 저지하기 위해,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북한의 오판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정상회담 때 거론키로 하고 여러 논리를 준비했다.
장진모/장성호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