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삼성전자로 옮겼던 '대우맨'이 다시 돌아온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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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일렉의 조용한 부활…1997년 중반 1만200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린 거대 기업이었다. 세계 곳곳에 25개 공장과 63개 판매법인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3년이 지난 지금 회사 직원은 1300명뿐이다. 공장은 6개로 줄었다. 해외 판매법인도 28개에 불과하다. 주력품목은 한물 갔다고 하는 냉장고와 세탁기 등 백색가전 제품뿐이다. 중요 의사결정을 할 오너도 없다. 워크아웃 중이어서 중요한 판단을 할 때는 은행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요즘은 아예 회사를 팔려고 시장에 내놓았다. 겉모습만 보면 아무런 비전도 없어 보이는 이 회사의 이름은 한때 '탱크주의'로 이름을 날렸던 대우일렉트로닉스(옛 대우전자)다. 이런 대우일렉이 최근 조용한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작년에는 최근 5년 만에 가장 많은 410억원의 이익을 냈다. 크지 않은 규모지만 2008년에 비해서는 13배나 급증했다. 올해도 작년의 2배 가까운 이익을 내겠다고 벼르고 있다. 잊혀져 가던 대우일렉트로닉스 부활의 비결은 무엇일까.
◆남들과 다르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다른 회사처럼 엄청난 광고비용을 쏟아부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르게 만드는 것뿐이다. "대우일렉 세탁기 사업부 박선후 상무의 말이다. 브랜드 파워는 떨어지고,돈을 쏟아부어 마케팅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살 길은 직원들의 아이디어뿐이라는 얘기였다. 아이디어의 출발은 고객의 사소한 불만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직원들이 직접 세탁기를 써보고 고객이 돼 '한마디 불평으로 끝날 만한 불편함'까지 놓치지 않고 해결한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드럼업 세탁기다. 2007년 대우는 드럼세탁기의 문제점 개선에 나섰다. 직원들과 고객들 공히 "드럼세탁기는 좋은데 빨래 넣고 꺼낼 때 허리가 아플 정도야"라고 말하곤 했다. 드럼세탁기의 빨래 투입구가 아래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우일렉은 드럼 위치를 끌어올리고 투입구 각도도 위를 향하게 만들어 주부들의 '허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제품을 만들었다. 2008년 출시한 '드럼업' 세탁기다. 국내 최초로 운동화 세탁 기능도 집어 넣었다.
작년에는 손빨래를 해야 하는 속옷,스타킹은 물론 걸레까지 세탁기로 빨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섰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게 '드럼업Ⅱ'였다. 이 제품은 세제를 매번 어렵게 투입해야 하는 불편함도 한꺼번에 해결했다. 세탁기가 알아서 세제를 넣어주는 '스마트 세제 자동투입 시스템'을 장착한 것.대우에 이어 다른 전자업체들도 이 시스템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2008년 출시하자마자 일반세탁기 시장 점유율 1위에 오른 또 하나의 히트상품은 '바람탈수-바람건조-바람업'으로 이어지는 바람세탁기 시리즈였다. '빨래를 빨리 마르게 할 수 없을까'하는 생각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대우는 최근 1,2인 가구를 겨냥한 7㎏ 용량의 드럼세탁기도 내놨다. 이 밖에 '말하는 전자레인지',속이 보이는 김치냉장고등도 직원들의 아이디어로 대우가 최초로 선보인 제품들이다.
◆대리가 임원 역할을 하게 하는 기업문화2003년 4월 대우일렉 서울 마포사옥 8층 해외영업부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미국 대형업체 M사에 냉장고 5억달러어치를 수출하는 계약을 성사시킨 것.당시 국내 가전3사 전체의 1년간 냉장고 수출 총액의 5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 계약을 성사시킨 주인공은 해외영업부 김정한 대리였다. 일반 회사에서는 최소한 임원이 담당할 임무였지만,그는 3년간 고객을 관리한 끝에 대박을 터뜨렸다. 회사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김 대리에게 맡기고 3년간 기다려줬다.
대우일렉 남미지역 판매담당자인 길은경 대리도 요즘 멕시코 전자레인지 시장 1위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다. 멕시코 시장에 출시한 멕시코 요리 전문 전자레인지에 대한 현지 반응이 뜨겁기 때문이다. 멕시코 현지에서 살다온 길 대리는 남미판매와 관련한 업무는 어지간하면 직접 처리한다. 대우일렉 관계자는 "대우일렉은 과거부터 업무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과감히 직원들에게 이양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 이런 문화가 어려운 시기를 버텨내게 해주는 힘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리가 과장,차장 일을 하고 과장,차장은 다른 회사 임원 수준의 권리와 책임을 갖는 문화가 직원들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대우일렉 관계자는 "직원들 중에는 삼성전자로 옮겼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월급은 적어도 자신이 책임지고 일을 하고 있다는 보람을 찾아 돌아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대우에서 냉장고 개발 전반을 담당하던 직원이 큰 기업으로 옮기면 냉장고 문에 들어가는 본드만을 연구해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기업조직이 커져 업무가 세분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직원은 직무 만족도 하락을 견디지 못하고 '컴백'한다는 설명이었다.
◆조용한 구조조정이 가능했던 이유
"떠나는 것으로라도 회사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승리의 기쁨을 함께하지 못하고 중도하차해 죄스러움을 느낀다. "
작년 구조조정으로 대우일렉을 떠난 직원들이 남은 직원들에게 남긴 메시지다. 대우일렉은 작년 TV,모터,에어컨,청소기 등 돈 안되는 사업부문을 모두 정리하면서 전체 인원의 절반 정도인 1200명을 정리해고했다. 이 과정에서 작은 잡음은 있었지만,상당수 직원은 회사 정상화라는 짐을 다른 직원들에게 남기고 가는 것을 미안해하며 회사를 떠났다. 이런 조용한 구조조정은 5년 만의 최대 이익으로 이어졌고,슬림해진 대우일렉은 '백색가전의 명가'라는 비전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기반이 되고 있다.
'대우'라는 브랜드에 대한 로열티와 10여년의 힘든 시간을 함께 겪어온 직원들 간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있어 이런 구조조정이 가능했다. 또 다른 회사와 달리 자기책임 아래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직무에 대한 만족감이 있었기 때문에 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다는 설명이다.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