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저축, 기업=투자' 공식 무너졌다

기업 총저축 215조…21% 껑충
금융위기속 투자는 8.9% 감소
가계 저축 증가율은 기업의 절반
가계는 저축을 하고 기업은 대출받아 투자에 나서는 자금흐름 공식이 깨졌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말 기업의 은행 총저축이 215조원으로 2008년의 177조3000억원에 비해 21.3%(37조7000억원) 늘었다고 2일 밝혔다. 기업의 은행 저축 증가율은 2000년(26.9%) 이후 최고이며 증가 금액은 사상 최대다. 기업의 은행 저축 증가율은 2005년 10.5%에서 2006년 7.8%,2007년 0.7% 등으로 둔화하다가 2008년 8.8%에 이어 지난해 큰 폭 증가로 바뀌었다. 기업의 은행 저축 가운데 1년 이상 저축성예금 규모는 2008년 말 149조2000억원에서 지난해 말 183조4000억원으로 22.9% 늘었다.

기업들이 이처럼 은행에 돈을 맡기고 있는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미래가 불투명해지면서 투자를 미루거나 축소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업들이 발행한 회사채 규모는 84조2000억원이었으며 이 가운데 차환용을 제외한 순발행액은 40조6000억원에 이른다. 2008년 회사채 총발행액이 52조8000억원,순발행액이 14조1000억원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지난해 회사채 총발행액은 60% 늘었으며 순발행액은 3배가량 증가했다. 여기에 주요 대기업들이 환율 상승(원화가치 하락)에다 저금리 덕에 막대한 이익을 올리면서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내부에 쌓였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로 수요가 급감하자 재고 정리에 주력하게 됐고 그 결과 설비투자는 8.9% 감소했다. 한은 관계자는 "기업들이 지난해 신용경색을 피하고자 상당한 자금을 단기 금융상품에 예치했다"며 "은행 저축 증가도 이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해 가계도 은행 저축을 늘리긴 했지만 증가율 측면에서 기업과는 비교가 안 된다. 가계의 은행 총저축은 2008년 말 326조6000억원에서 지난해 말 360조5000억원으로 10.4%(33조9000억원) 증가,증가율이 기업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더군다나 가계는 저축액 이상으로 차입을 늘려 은행 돈을 빌려 쓰기 바빴던 것으로 분석된다.

가계대출은 2008년 말 648조3000억원에서 지난해 말 692조원으로 43조7000억원 증가했다. 신용카드 등을 통한 신용구매 등을 더한 전체 가계빚(가계신용)은 2008년 말 688조3000억원에서 지난해 말 733조7000억원으로 45조4000억원 증가했다. 가구당 빚은 4337만원으로 전년 말의 4128만원보다 5.1% 늘었다.

전체 가계빚 증가액 중 주택담보대출 증가액은 33조1000억원으로 73%에 이르렀다. 은행의 주택담보대출이 24조5000억원,2금융권의 주택담보대출이 8조6000억원이다. 한은은 그러나 올해부터 기업의 설비투자가 증가할 전망이어서 기업의 저축이 지난해처럼 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