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탁신재판'과 사법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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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권위 무너져 泰 정국불안 가중오랜만에 다시 찾은 방콕의 거리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달 26일 탁신 전 총리의 재산 몰수를 명한 대법원의 결정에 항의하는 탁신 지지세력들의 반발과 대규모 시위 예고로 정정불안이 우려되고 있지만,정부 청사와 법원 등 주요 기관들에 대한 경계가 삼엄해진 것을 제외하면 그 밖에 특별히 달라진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친절하고,순박하고 수줍은 표정으로 도처에 붙은 푸미폰 국왕의 사진 사이를 오간다.
'판결논란' 우리 사법부에 반면교사
14일로 예고된 친탁신 세력의 반정부 시위로 태국 경제가 뒷걸음질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대법원의 몰수판결이 5년에 걸친 친탁신과 반탁신 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을 종식시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태국은 2006년 부정 축재 사실이 드러난 탁신이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이래 끊임없는 혼란과 시위에 시달렸다. 2008년 반탁신 세력의 시위로 방콕 파타야 등 국제공항이 폐쇄됐고,작년 4월 탁신 지지자들의 대규모 시위로 '아세안+한 · 중 · 일' 정상회의가 무산된 일까지 있었다. 분열과 대립이 끊이지 않으니 국왕으로선 마음의 병이 더 깊어졌을 것이다. 오랜 역사,특히 단 한번도 외국에 정복되지 않았던 빛나는 역사,광대한 영토와 풍부한 자연자원,6500만의 인구를 자랑하며 한국전 당시 우리를 도왔던 나라,태국이 이처럼 분란에 시달리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민주화와 경제,특히 자본과의 관계가 순탄치만은 않고,거듭된 군사 쿠데타의 후유증도 심각하다. 하지만 제대로 고난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할 역량이 부족하고 또 미래를 향한 발전의 의지도 박약할 수밖에 없다는,한 전직 고위 외교관의 한탄은 결코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살아있는 부처'로 추앙받는 푸미폰 국왕의 건강 쇠약도 정정 불안의 요인으로 꼽히지만,아시아 어느 나라보다도 더 일찍 잘 정돈된 사법제도가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도 정정불안의 요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국왕이 나서지 않아도 사법부가 법과 원칙에 의해 갈등을 해소해 국왕의 심기를 편하게 하려던 것이겠지만,법원의 판결이 오히려 분열과 대립의 원인이 되는 결과가 됐다.
태국은 매우 강한 사법부를 가진 사법적극주의의 나라다. 선봉에는 단연 헌법재판소가 있다. 2007년 5월 헌법재판소는 2006년 4월 총선 선거부정을 이유로 타이락타이(TRT) 등 4개 정당에 해산명령을 내렸고 이후 총선에서 집권한 탁신계 신당 국민의힘(PPP) 등 집권 3당에도 선거부정을 이유로 해산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현재의 아피시트 총리가 집권할 수 있었다. 대법원이나 이번에 창설 9년을 맞은 최고행정법원도 뒤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랜 전통을 지닌 사법제도와 재판관들의 자신감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너무 강한 사법이 국론 분열과 갈등을 종식시키기보다는 또 다른 분란을 가져오거나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푸미폰 국왕이 행사해온 현실정치에 대한 영향력에 비하면 사법이 정치적 현안에 대해 판결을 통해 끼친 영향력이나 효과는 불분명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부정적인 평가와 맞물리는 측면도 없지 않다. 최근 정치권 등으로부터 십자포화를 받은 우리나라 사법부의 처지는 그에 비하면 평온에 가깝다. 우리에겐 국왕은 없지만 국민이 있다. 결국 관건은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에 있다. 하지만 너무 이리저리 휘둘려서도 안 될 일,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한 건 아닌가.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자칫 하루아침에 허물어질 수 있는 게 신뢰라는 교훈을 새삼 엄숙하게 되뇌어 본다.
홍준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