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강남 인사이드] (4) 자수성가 부모일수록 더 엄격…'파더 콤플렉스'에 시달리기도

(4) 전략적 자녀 관리

오냐오냐 키우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경제관념 생활화
"유산상속 없다" "골프 치지마"
재산 많아도 일부러 기업 입사
잘 나가는 부모 기대 못 미치면 '000 자제' 꼬리표 오히려 부담
대기업 입사 5년차인 김민호씨(31).성실한 근무 태도와 깔끔한 업무 처리,예의바른 성격으로 조직 내에서 평가가 좋다. 대학 시절 운동권 학회에도 참여한 그는 짬짬이 농구를 즐긴다. 평범한 회사 초년병으로 보이지만,그는 서울시내 대형 호텔 소유주의 아들이다. 김씨 가족의 재산규모는 1000억원대에 이른다. 아버지는 김씨에게 대기업에서 일정 기간의 훈련을 거친 뒤 호텔 경영을 맡으라는 '특명'을 내린 상태.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음의 부담이 커지고 있단다.

"어려서부터 '사업은 한순간에 망할 수 있으니 항상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얘기를 귀가 따갑게 들어왔어요. 그래서 솔직히 겁이 나요. 차라리 지금 직장에서 평생을 보내는 게 더 마음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기업 입사는 전략적으로

1970년대에 강남에 진입해 성공가도를 달려온 세대의 2세 그룹이 사회에 본격 진출하는 시기가 왔다. 부(富)를 축적하고 강남에 정착을 완료한 1세대는 이제 본격적으로 부를 승계하는 데 나서고 있다. 적정 수준을 넘어서는 돈이 자녀의 장래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전략적으로 자녀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부모들이 많다. 여유로운 환경과는 별도로 다양한 사회경험과 정확한 경제관을 쌓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1세대가 이룩한 부를 다음 세대에도 성공적으로 확대 재생산하겠다는 것이다.

연매출 200억원대 중견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집안의 이진우씨(33)는 중학생 시절부터 아버지에게서 "사업체를 물려받아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다.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이씨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다. 일본 미국에서 어학연수도 했다. 지금은 국내 굴지의 L사에서 국제 비즈니스에 대한 실무를 익히고 있다. 곧 미국 대학에 유학을 갈 예정이다. 이씨는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마치면 아버지 회사의 중국 진출을 도울 예정"이라며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러 돈 안줘

시계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집안의 안현우씨(29)는 모스크바대를 나왔다. 장차 러시아 비즈니스를 꿈꾸고 있다.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는 아버지의 지인 밑에서 학업과 동시에 사업에 대한 훈련도 받았다. 부유층 자제로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아버지가 일찌감치 "유산 상속은 꿈도 꾸지 말라"고 선언했다는 것.또 유산을 놓고 형제간에 다툼이 벌어질 것에 대비해 "결혼하면 100㎡(30평형) 아파트 한 채만 사주고 나머지는 모두 좋은 곳에 쓸 생각"이라고 못을 박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 연탄배달부,건설 일용직 등 갖은 고초를 겪고 자수성가했다는 그의 아버지는 여행과 유학은 자유롭게 보내주되 씀씀이는 철저하게 관리한다고 한다. "부모님이 제게 해 주신 최고의 선물은 마음 편히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한 것이에요. 저도 나중에 부자가 되고 싶지만,물려받은 재산 축내면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중견기업에 다니고 있는 양석준씨도 비슷한 케이스다. 아버지는 500억원대 이상의 자산가이지만 결혼 때 65㎡(20평)짜리 아파트 한 채만 마련해줬다. 양씨는 결혼한 이후 자신이 버는 월급으로만 생활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어렵게 성장하신 탓인지 항상 돈을 아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며 "아내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양씨는 소매가 닳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부모님이 돈이 많아도 형제끼리 나눠 갖고 세금 내고 하면 그렇게 많이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며 "그런 생각을 하면 오히려 더 아껴 쓰게 된다"고 설명했다.

김민호씨가 인터뷰 때 입고 나온 청바지도 색이 바래 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입고 다니냐고 묻자 김씨는 "명품 소비에는 큰 관심이 없다"고 답했다. 그는 "아직도 어머니는 남대문시장에서 옷을 사신다"며 "집에서는 헛바람 든다고 골프도 못 배우게 한다"고 했다.

◆'○○○ 자제'로 기억되면 속상해해하지만 강남에는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부모만큼의 재산을 일굴 자신이 없거나 스스로 원하는 직업을 갖지 못한 경우 '파더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이들도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 자제'나 '○○기업 둘째'로 기억할 때 특히 그렇다고 한다. 아버지가 대형 종합병원의 의사,어머니는 의과대학장인 H씨(31 · 부동산회사 근무)는 "부모님들이 어려서부터 공부를 굉장히 많이 강조하셨는데 제 학업 성적은 그렇게 신통치 않았다"며 "아버지가 제 직업을 크게 자랑스러워하지 않아 속상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유력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로 있지만 아직 직장을 잡지 못하고 있는 S씨(30)도 "한번 주눅이 드니까 앞날이 더 불안하게 다가온다"며 "유학을 생각하고 있지만 부모님 기대를 충족시킬 자신이 없다"고 토로했다.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