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재정정책의 '반면교사' 일본

국가채무 증가 소비 위축 초래
재정건전성 유지하고 신뢰 얻길
정부가 지출을 늘리거나 세금을 깎아주면서 이로 인해 발생하는 재정 적자를 정부채권 발행을 통해 보충한다고 하자. 일단 재정지출을 확대하거나 감세를 단행하면 일반적으로 민간소비가 늘어나면서 팽창재정의 효과로 인한 경기부양이 이뤄질 것이다. 그런데 이때 늘어난 빚은 어떻게 되는가. 궁극적으로 미래에 가서 부채를 상환할 때 정부가 그만큼 더 세금으로 걷어 갚게 돼 있다. 일종의 조삼모사라고나 할까.

따라서 만일 납세자들이 극단적으로 합리적이라고 가정하면 그들은 세금이 줄어들거나 지출이 증가된 부분을 추가소비에 충당하지 않고 향후 국가부채 상환 재원으로 저장해 놓을 것이다. 어차피 나중에 자신이 부담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가정이 성립한다면 현재 시점에서 국가부채 증가를 통해 시행되는 팽창적 재정정책은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소위 '리카도 등가성'이라는 명제가 지적하는 메시지다. 물론 이 명제의 내용은 극단적이다. 실제로는 대부분 경제주체는 영원히 살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세상을 떠난 이후까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현 세대가 빚을 내 소비를 늘리고 나서 부채 상환은 미래세대로 전가해버릴 수 있게 되므로 현실에서 이러한 상황이 성립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런데 최근 일본의 모습을 보면 '리카도 등가성'이 현실화되는 듯한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국가부채는 올해 약 1000조엔으로 GDP(국내총생산)의 200%가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비록 가계 보유자산이 1500조엔이 넘는다고는 하지만 안심이 영 안 되는 분위기다. 이러다 보니 늘어나는 노인들이 은퇴 이후 받는 연금조차 저축을 할 정도로 분위기가 위축돼 있다.

물론 노령세대가 미래 국가부채 상환용 자원 마련을 위해 소비를 줄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국가채무 증가와 극심한 노령화로 경제 규모가 줄어들면서 미래에 대한 극심한 불안감이 나타나고 이러한 불안감이 소비 위축과 투자 위축으로 이어지면서 재정정책은 무효화되고 경제는 자꾸만 고꾸라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우려할 만하다. (필자는 이를 '일본판 리카도 등가성'이라 명명하기를 제안한다) 최근 일본 긴자 근처 세이부 백화점이 올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이러한 위기의식이 기우만은 아니다. 국가부채에 대한 우려와 미래에 대한 극단적 불안감이 팽창적 재정정책의 효과를 줄여버리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경제가 아직 이런 수준까지 이르지 않은 것에 일부 안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에게 훌륭한 교사인 동시에 닮지 않아야 할 모델이기도 하다. 부품산업의 경쟁력은 상당하고 사회질서 의식 등 선진적인 특성은 여전히 배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노령화,경기침체,경제위축 등은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다. 2009년 GDP 성장률은 0.2%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3위다. 작년 성장률의 절대적 숫자는 작지만 상대적으로는 의미 있는 수준을 달성했다. 또한 우리의 국가채무는 GDP 대비 35% 정도로 충분히 통제 가능한 수준이다. 정부는 최근 경제위기를 감안해 출구전략의 시기를 조절하되 재정건전성을 적절하게 유지하면서 이를 지속적으로 통제 가능하다는 신뢰를 국민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경제는 심리전이다. 심리전에 밀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전체 경제운용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정책홍보를 강화해야 한다. 아직도 훌륭한 교사이면서 동시에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일본을 연구하고 배울 것은 배우되 지양할 바를 찾는 지혜가 절실한 때다.

/바른금융재정포럼 이사장

윤창현 < 서울시립대 교수·경영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