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사법부는 자정기능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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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주관에 의존…견제기능 없어영국의 유명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그의 저서 《시간의 역사》(1988)의 말미에 아이작 뉴턴의 인간성에 관해 평한다. "뉴턴은 호감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라이프니츠와 뉴턴은 제각기 미적분학을 개발했는데,오늘날 우리는 뉴턴이 라이프니츠보다 수년 먼저 미적분법을 발견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뉴턴은 이를 훨씬 뒤에 발표했다. 누가 먼저냐의 싸움으로 과학자들은 양분됐으며,놀라운 일은 뉴턴을 변호하는 논문 대다수가 그의 친구 이름으로 출판됐지만 뉴턴의 친필로 씌어졌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이 분쟁 해결을 왕립학회에 호소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학회 회장인 뉴턴은 조사위원회를 그의 친구들로 구성했고,라이프니츠는 표절로 고발됐다. 라이프니츠가 죽은 후 뉴턴은 '그의 가슴을 찢는 것에 거대한 만족을 얻었다고 공언했다는 것이다. "
판결시비 국민평가 겸허히 들어야
여기서 우리는 뉴턴의 인간성보다 그가 개인적 영향력으로 판결을 좌우한 점에 관심을 갖는다. 오늘날 뉴턴 같은 사람이 법원을 지배한다면 큰 일 아닌가. 그러나 작금 굵직굵직한 사건마다 이를 연상시키는 판사와 판결이 줄을 이었음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이동연 판사는 강기갑 의원이 '흥분한 상태'에서 국회폭력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내렸다. 문성관 판사는 1997년 이래 미국에 광우병에 걸린 소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런 사정만으로' 광우병 우려 소가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PD수첩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진현민 판사는 빨치산 추모제에 학생을 동원한 교사의 행동이 자유민주주의를 해칠 만한 "실질적 해악성이 없다"는 새로운 무죄논거를 만들었다.
최근 사법부에 대한 여론의 시비가 잦은 것은 이 같은 법원판결에 대해 국민의 의심이 쌓인 결과다. 지난주 사법제도 개선안을 놓고 대법원과 한나라당이 격돌한 것은 드디어 사법부의 오래된 문제가 터질 때가 됐음을 알리는 징표다. 대법원은 성명서를 통해 "사법부를 고쳐나가는 일은 마땅히 사법부가 주체가 돼야 한다"며,한나라당 개선안은 "일류 국가를 지향하는 우리나라의 품격에도 어울리지 않는" 무례한 처사라고 했다. 이 비판을 책임지려면 사법부는 일류 민주국가를 만드는 데 그들이 지금 어떤 역할을 하는지부터 돌아봐야 한다.
최근 한국사회는 선진사회로 가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보여준다. 기업은 가장 빠르게 변하고 있다. 기업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야 생존하므로 국내외 시장에서 칼 같은 경쟁에 직면하며 부적격자를 주저 앉혀줄 자리가 없다. 대학은 학생의 선택과 외부평가를 받기 위해 변하고 있다. 지금의 교수들은 강의평가와 논문실적에 잠시도 편안할 짬이 없다. 정치가들은 포퓰리즘에 흔들리고 있지만 그래도 유권자의 선택을 얻기 위해 경쟁한다. 오늘날 군청,동사무소에 가면 얼마나 친절한지 황송할 지경이다. 지자체장들이 선거로 뽑히기 때문이다. 사법부는 어떠한가. 오늘날 한국의 법원은 이 '국민선택의 규칙'을 적용받지 않는다. 판사들은 거의 왕조시대 판관처럼 대법원이 독자적으로 임용하고 판사의 개인적 판단에 따라 유무죄 판결을 한다. 그는 선출되지도 견제 받지도 않는다. 지금 사법부의 역할은 사법부 자율에 맡겨질 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법판결은 침해된 개인의 권익을 회복해주는 최후 과정이다. 우리는 매일 중요한 국가 사회적 현안이 법원판결로 종결됨을 본다. 미국의 변호사 1인당 국민의 수는 한국의 50분의 1에 지나지 않듯이 향후 한국이 선진화될수록 법원의 역할은 더욱 커질 것이다. 따라서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사법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사법부가 외부간섭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지금 철저한 자정기능을 마련하고 작동케 해야 할 때다.
김영봉 < 세종대 석좌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