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종이 질 좋다고 양서 아닌데

"고급 종이만 선호하는 책 소비자들의 인식부터 바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책값이 올라 독자들이 손해를 보게 되니까요. "

출판업계가 직면한 '종이대란'에 대해 Y출판사 대표는 23일 이렇게 말했다. 수입 펄프의 비중이 80%를 넘는 상황에서 제지업계가 당장 고급지인 백상지(모조지) 생산을 늘리기는 어려우므로 불필요한 수요를 줄여야 종이 품귀현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품귀현상의 책임이 책의 소비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수출물량을 늘리는 대신 내수공급을 줄인 제지회사도 품귀현상에 한 몫했고,종이값이 오른다고 하자 미리 종이를 사 두려는 일부 유통업체나 출판사의 가수요 유발 책임도 있다. 고급지로만 책을 만들려는 출판사들은 종이대란의 피해자이자 유발자다.

하지만 책의 생산,유통,판매 과정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서점에 가보면 거의 대부분의 책이 백상지로 만들어져 있다. 백상지보다 한 단계 아래인 중질지로 된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중질지나 재생지로 인쇄한 책은 환경 관련서 등 극히 일부다.

왜 그럴까. 출판사들은 "고급지로 만들지 않으면 팔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소연한다. 고급지로 만든 책은 글이나 그림의 인쇄 상태가 중질지보다 선명하다. 따라서 독자들이 고급지로 만든 책을 선호하므로 출판사들도 고급지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독자나 출판사들의 지나친 고급지 선호 경향이다. 굳이 백상지를 쓰지 않아도 될 소설책과 일반 단행본,학습서,월간지 등을 백상지로 만들다보니 수요가 넘친다는 것이다. 중질지나 재생지로 만든 책이 흔한 미국 · 유럽 등과 대비되는 현실이다.

H출판사 대표는 "중질지나 재생지로 만든 책은 가볍고 번쩍임도 없어 휴대하거나 읽기에 훨씬 편한데도 대다수 독자들은 고급지로 만든 책만 선호한다"며 "내용보다 표지 장정이나 종이 질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종이 공급난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최근 입적한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소유'하려는 일부 독자들의 지나친 열의와 경쟁도 미성숙한 독서문화를 보여주는 증표다. 법정 스님이 강조한 가르침보다는 그 가르침을 담은 책을 갖는 데만 관심이 쏠리고 있어서다. 책이라는 '그릇'과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에만 집착하지 않는 성숙한 독서문화가 아쉽다.

서화동 문화부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