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는 죄악' 뿌리 깊은 청교도 철학…정부 간섭에 거부감

복지제도 왜 반대하나
"의료비도 벌어서 내야" 생각…100년간 시도 번번히 좌초
이번 개혁안도 미완성 작품
미국은 그동안 선진국 중 유일하게 전 국민이 두루 가입하는 '보편적 의료보험제도'를 시행하지 않는 나라로 꼽혀왔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정치 명운을 걸었던 의료 개혁법안이 마침내 의회를 통과함으로써 미국도 9년 뒤면 국민의 95%가 의료보험 혜택을 받게 됐다.

1912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의료보험 도입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낙선한 이후 100년 가까이 끌어왔던 보편적 의보제도 도입이 드디어 결실을 보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기까지 '산통'은 극심했다. 이번에도 공화당에선 단 한 표도 찬성표를 얻지 못했다. 지난 1년간의 입법 추진 과정에서 나타난 '티파티'라 불리는 보수그룹의 저항운동도 바로 꺾일 것 같지 않다. 뉴욕타임스(NYT)가 '오바마의 위험한 승리'라고 지적한 배경이다.

비싼 의료비용 부담으로 '악명'높은 미국에서 국가가 나서 의료 혜택을 늘려주겠다는 취지의 의보 개혁이 이처럼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온 이유는 뭘까.

거슬러 올라가보면 미국의 '뿌리'와 관련돼 있다. 미국은 유럽에서 구교의 탄압을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온 신교도(청교도인)들이 세운 나라다.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고 정부 간섭을 싫어한다. 대통령의 연설장에 소총을 들고 어슬렁거려도 법적으로 보장된 자유와 권리(미국 애리조나 등 일부 주에선 총을 보이게 소지하는 것은 합법)는 국가가 침범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바로 미국이다.

특히 청교도는 노동을 미덕으로,나태를 죄악으로 생각한다. 가난한 것은 기본적으로 개인 책임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의보 개혁에 반대하는 미국인들은 자기 스스로 열심히 돈을 벌어 의료보험비도 내고 건강도 알아서 챙기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재정 부담의 논란 뒤엔 이런 인식차가 깔려 있다. 이러한 사상은 미국 보수진영 철학의 근간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정치 · 사회적 배경 때문에 지난 100년간 주로 진보 성향의 민주당 출신 대통령들이 추진해온 의보 개혁은 번번이 좌초됐다. 1934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회보장제도를 구축하면서 전 국민에게 혜택을 주는 의료보험을 도입하려 했으나 미국의학협회의 반대로 실패했다. 1945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도 의보 개혁 10개년 계획을 추진했으나 사회주의적이라는 반대에 부딪쳐 좌절됐다.

그나마 성공을 거둔 것은 1965년 린든 존슨 대통령 정도.그는 '위대한 사회'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복지 확대 정책을 펴면서 노령자 대상 의료보험인 메디케어와 저소득층 및 장애인용 무상의료 제도인 메디케이드를 도입했다. 이 역시 제도 도입 후엔 호응을 얻었지만 당시엔 사회주의 제도라며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도 의보 개혁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오바마 대통령 역시 이번에 의보 개혁을 추진하면서 '사회주의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당초 야심차게 추진했던 공공의료보험은 정부가 '죽음의 패널'을 만들려 한다는 공화당의 정치적인 주장과 보험업계의 로비로 결국 도입이 무산됐다. 미국에서 '사회보장'이 도입 · 확대된 시기는 정부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강조됐을 때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5년 사회보장법을 도입한 것은 대공황 이후 국가 재건을 위한 뉴딜정책의 일환이었고,오바마 정부가 의보 개혁법안 통과에 성공한 것도 '금융위기'로 인해 미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공화당의 입지가 약화된 게 도움이 됐다.

국내 전문가들은 미국의 의보 개혁에 대해 '중대한 진전'이지만 한계가 많은 '미완성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정현선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미국은 그동안 '시스템 없는 의료시스템(medical non-system)'이라는 표현을 들었을 정도로 제도 자체가 아예 어긋나 있었다"며 "이번에 통과된 의료보험 개혁안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적보험이 아닌 일종의 타협안인 만큼,앞으로 더 개혁해야 하는 미완성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건강보험정책연구원의 최인덕 박사는 "미국은 완전 시장경쟁에서 출발했다가 복지 요소를 도입하고 있는 반면 네덜란드와 독일 등 유럽은 복지국가 모델에서 출발해 시장 요소를 의료보험에 넣고 있다"며 "시장과 복지를 반드시 서로 대립항으로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박성완/이상은 기자 ps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