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베이비 붐 세대 가장의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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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남편' 존경받기 힘든 사회올해부터 베이비 붐 세대(1955~1963년 출생) 가장의 은퇴가 시작되면서 새삼 이들의 거취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베이비부머들의 대량 은퇴가 만만치 않은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킴에 따라 이들을 대상으로 정년 연장,임금 피크제,단계별 퇴직 등의 논의가 시작되자마자 곧 "아버지 일자리를 지키려고 아들 일자리를 빼앗느냐"는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정과 일 조화되는 문화 시급해
한데 지금 베이비 붐 세대 가장이 겪는 고뇌는 단순한 일자리 상실을 넘어 개인의 생애주기 상 최대의 위기를 경험하는 데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세간에 떠도는 우스갯소리 가운데 세상에 불가능한 일 중 하나가 '은퇴한 남편 존경하기'라니 말이다. 베이비 붐 세대 가장은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기에 사회 진출을 시작해 전형적인 '일 중심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세대로서,직장과 가족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판단해보라는 질문에 10명 중 7명이 직장이 더 중요하다고 답했던 세대다. 물론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가족 때문'이란 명분을 내세우긴 했지만,정작 가족의 일상 속에 아버지는 부재(不在)하는 역설을 낳은 세대이기도 하다.
얼마 전 50대 중후반,은퇴를 앞둔 남성들과 자리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그곳엔 대기업 임원,연구소 소장,신문사 논설위원 등 사회적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자리에 있는 이들이 다수였는데,일단 화제가 가족으로 모아지자 남편 및 아버지로서의 정체성은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이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 대기업 임원은 "돌이켜보니 자신은 가족 안에선 현금인출기였고,자녀들로부터는 왕따 당하고 있음에 솔직히 자괴감이 밀려온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나마 중류층 이상의 베이비 붐 가장은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다. 대기업 임원으로 은퇴하면 중소기업으로 옮겨갈 수도 있고,경제력이 확보되면 인생 2모작의 기회를 만들어 의미있는 사회활동을 시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완전히 일손을 놓고 가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가장은 경제적 위기에 더해 정체성 상실까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한국 사회의 경우 여성의 연령별 경제활동 참가율이 전형적인 M자 곡선을 그린다는 사실은 대체로 알려져 있지만,50대 이상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다른 국가에 비해 유난히 높다는 사실은 흔히 간과돼 왔다. 가장은 은퇴했는데 그동안 자식들 교육시키랴 결혼시키랴 정작 자신들의 노후를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부인들이 뒤늦게 노동시장에 뛰어드는 덕분에 생긴 현상이다. 이들 50대 이상 여성에게 허용되는 노동시장은 주로 파출부 간병인 등 가사관련 서비스업종에 집중돼 있음은 물론이다.
이제 고령화 덕분에 베이비 붐 세대 앞엔 25년 내지 30여년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 베이비 붐 세대 가장의 고뇌가 더욱 깊어가기 전에 보다 종합적인 대책마련이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 맞벌이 부부가 규범화된 아들 · 딸 세대는 '일 중독'에 빠졌던 아버지 세대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남녀 공히 '일-가정 양립'을 위한 친가족적 조직문화를 선호하고 있다.
베이비 부머들 또한 더 늦기 전에 생계 부양자 역할 못지않게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정체성 또한 매우 중요함을 자각함으로써 정서적 안정성을 회복할 일이다. 조직 차원에서도 산업사회의 그림자라 할 수 있는 '일 중심' 이데올로기를 뛰어 넘어 일과 가족의 균형과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문화를 더욱 공고히 함으로써 은퇴기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도록 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명실공히 선진국답게 베이비 붐 세대가 일을 떠나서도 경제적 안정성을 누릴 수 있도록 생애주기별 사회안전망을 공고히 하는 노력 또한 게을리해선 안 될 것이다.
함인희 <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