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낙훈 중기전문기자 '현장속으로'] 렉서스 브로셔 찍는 성수동 인쇄장인들, 日을 매료시키다

77세 조영승 삼성문화 인쇄사장ㆍ30년 경험의 베테랑 직원들
10만원 넘는 화보집 잇달아 수주…미쓰비시 카탈로그도 만들어
일본 굴지의 책방인 기노쿠니야 등에는 유리창에 진열해 파는 고급 화보집들이 있다. 일반인이 함부로 꺼내 볼 수 없는 이 책들은 권당 가격이 10만원이 훨씬 넘는다.

서울 성수동에 있는 삼성문화인쇄(사장 조영승 · 77)가 이런 고급 화보집을 잇달아 수주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회사는 최근 일본 알파북스로부터 '일본의 로고와 마크'를 수주해 인쇄 · 납품했다. 이 책의 권당 가격은 1만2000엔으로 14만원이 넘는다. 이렇게 삼성문화인쇄가 수주한 고가의 일본책만 해도 10여종에 이른다. 이 중 'ADC:일본 최고의 디자이너 52인이 만든 디자인'은 권당 2만1500엔으로 약 25만원에 이른다. '전국의 토산품 디자인집'은 1만4000엔이다. 이들 책을 종류별로 4000~6000권씩 주문받아 납품했다.

일본의 인쇄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를 뒷받침하는 고급 인쇄업체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일본 바이어들이 삼성문화인쇄에 발주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일본 제품보다 품질이 낫다고 판단한 때문.이는 "오로지 제품으로 승부한다"는 조영승 사장의 경영스타일 덕분이다.


1956년 창업해 54년째 인쇄업을 하고 있는 조 사장은 그동안 번 돈을 최고의 인쇄기계를 장만하는 데 모두 썼다. 그는 200번 넘게 일본을 찾아 최신 인쇄 설비와 인쇄출판 트렌드를 챙기고 있다. 30~40년 동안 한솥밥을 먹은 베테랑 종업원도 큰 힘이 됐다. 이 회사 직원은 48명.이 중 30년 이상 근속자가 6명으로 전체 직원의 10%가 넘는다. 40년이 넘은 사람도 2명이나 있다. "우리 회사는 정년이 따로 없기 때문에 건강만 허락하면 100세까지도 일할 수 있다"며 "이렇게 오래 일한 베테랑 덕분에 이제까지 그 까다롭다는 일본 바이어들이 단 한번도 클레임을 제기한 적이 없다"고 조 사장은 설명한다.

똑같은 기계로 제작해도 숙련된 기능인력이 없으면 최고급 인쇄물이 나올 수 없다. 잉크 배합부터 온도 습도 기계 관리와 좋은 종이 등이 조화를 이뤄야 최고급 인쇄물이 나오는데 이를 관장하는 것은 결국 숙련된 기능인력이기 때문이다.

이 회사가 만드는 제품은 인쇄 분야의 초일류 제품들이다. 인쇄의 최고봉은 도록(圖錄)을 꼽는다.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빛깔을 재현하려면 최고 인쇄기술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중앙박물관과 간송미술관의 도록이 이곳에서 인쇄됐다. 브로셔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것은 자동차다. 펄 도장을 비롯한 미묘한 색감을 잘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렉서스의 브로셔가 이곳에서 인쇄된다. 뿐만 아니다. 일본 미쓰비시 등 종합상사 카탈로그도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사사(社史)는 그 회사의 역사다. 일류 회사가 사사 발간 시 고급 인쇄소를 찾는 것은 물론이다. '삼성 60년사'를 비롯해 LG 한솔 포스코의 사사가 이곳에서 인쇄됐다.

일본항공(JAL) 캘린더도 이곳에서 제작된다. 대통령 사진을 관공서에 걸어놓던 시절엔 청와대 직원들이 최고급 인쇄업체를 수소문한 뒤 이곳에서 대통령 사진을 인쇄해갔다.

조 사장은 자가용이 없다. 희수(喜壽)의 나이에도 항시 전철을 타고 출근한다. 전형적인 수주산업인 인쇄업체를 운영하지만 사내엔 수주를 위한 '영업팀'도 없다. 영업부라는 이름으로 3명을 두고 있지만 이들은 주문을 따내기 위해 뛰는 사람들이 아니다. 기존 거래처와 업무 연락을 위한 조직일 뿐이다. 접대비도 없다. 이른바 '3무(無)경영'이다. 스피드와 변화를 강조하는 현대 경영과는 동떨어져도 한참 동떨어졌다. 하지만 시대에 뒤처진 듯한 삼성문화인쇄가 인쇄 분야의 최고 선진국인 일본에서 고가 인쇄물을 잇달아 수주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는 오로지 '제품의 힘'을 믿는다.

조 사장은 "젊은이들이 인쇄업체에서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해 현장 근로자들이 고령화되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최근엔 20대 젊은이 3명이 한꺼번에 입사해 활기를 불어넣고 있어 아주 기쁘다"고 말한다. 이렇게 3명이나 입사한 것은 정말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인쇄장인으로 키우는 게 조 사장의 꿈이다.

6 · 25전쟁 때 개성에서 월남한 조 사장은 서울 무교동의 지인 사무실 한쪽을 빌려 가리방(등사판)과 롤러로 밀어 프린팅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지금은 캘린더 브로셔 도록 단행본 사사 등을 인쇄하며 직원 48명에 연간 매출은 70억원(가공임만을 매출로 계상) 수준이다. 설비는 일본 미쓰비시의 4색 · 5색 · 6색 · 8색 오프셋 인쇄기와 독일의 폴라재단기 스탈접지기 등을 갖추고 있다. 8색 오프셋 인쇄기는 대당 40억원대에 이르는 고가 설비다. 이들 오프셋 인쇄기는 점보항공기 수준의 정밀도를 갖춘 장비로 평가되고 있다.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