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로스차일드家

영국의 투자은행 NM로스차일드&선스는 '비밀의 화원'으로 불린다. 일반에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 각국 정부나 왕실,부호들의 돈을 은밀하게 관리하는 데 탁월한 수완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고객의 비밀이 새나갈 것을 염려해 가족 이외엔 고위직을 맡기지 않는다. 그런 전통을 무려 250여년이나 지켜왔다.

로스차일드가(家)의 신화는 유대계 소년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에서 시작됐다. 1750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은행 심부름을 하던 마이어는 막강한 권력과 부를 쥐고 있던 빌헬름 공작을 우연히 만났다. 빌헬름의 취미가 화폐수집이란 것을 알고 희귀 동전을 싼값에 구해주면서 친분을 쌓았다. 빌헬름이 나폴레옹에게 쫓겨 피신했을 때 상당한 손해를 보면서까지 공작의 재산을 지켰다. 이를 계기로 빌헬름의 대외 재정업무를 관장하게 된다. 마이어는 5명의 아들을 런던 파리 빈 나폴리 프랑크푸르트로 각각 보내 금융네트워크를 구축한 다음 '재산 불리기 지침'을 내렸다. 유럽 각지에서 발빠르게 취합한 정보를 근거로 과감하게 투자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지침은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5형제가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나폴레옹의 패전을 예상,영국과 러시아의 국채를 싼 값에 사들인 뒤 비싸게 팔아 거액을 챙긴 것이다. 로스차일드가는 19세기 후반 영국 산업혁명 바람을 타고 세계 금융리더로 군림한다.

이처럼 가족 경영과 고객 비밀지키기를 금과옥조로 삼았던 로스차일드가도 변화하는 모양이다. 로스차일드&선스의 최고경영자에 가문과 관련 없는 전문 경영인 니겔 히긴스(49)가 최근 임명됐다고 한다. 고객관리는 여전히 로스차일드가의 7대손인 데이비드 회장이 맡고 히긴스는 내부 조직 강화를 전담한다지만 어떻든 금융계에선 대단한 '파격'으로 평가한다.

로스차일드가가 개혁에 나선 데는 이유가 있다. 명성이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다. 로스차일드&선스의 자산은 지난해 말 58억834만달러로 골드만삭스의 140분의 1 수준이다.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들었던 과거와 비교하면 보잘 것 없는 규모다. 그래서 기존 자산관리에서 벗어나 골드만삭스처럼 트레이딩 위주의 투자은행으로 변신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황에 맞는 변화와 혁신이 따르지 않으면 누구도 살아남기 어려운 게 요즘의 기업 풍토다. 전통의 로스차일드도 마침내 변화의 출발선에 섰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