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Better life] 재테크 말고 '재무설계' 하셨나요?

◆생애재무설계 이해하기
결혼·출산·자녀교육·은퇴…인생 포인트 맞춰 재무목표 설정
재테크는 고수익이 주목적이지만 재무설계는 포트폴리오 균형에 초점

대기업에 다니는 이길태 부장(47 · 가명)은 연봉 8000만원의 고소득자다. 현재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 전세를 살고 있다. 그는 2000년 IT(정보기술)버블 당시 집을 팔고 주식에 투자했다가 1억여원을 날렸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에게 들어가는 교육비만도 월 200만원.게다가 각종 공과금,차량 유지비 등 생활비를 쓰고 나면 그 많던 월급이 온데간데 없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노후에 대한 준비는 꿈도 못꾼다. 곧 대학에 들어갈 아이들의 등록금은 어떻게 마련할지 막막하다. 글로벌 회사로 성장한 직장에서 고액 연봉을 받고 있지만 날로 심해지는 실적 경쟁 속에 언제 회사를 나와야 할지 불안하기만 하다.

이 부장은 우리 시대 중산층의 자화상이다. 대부분 가장들이 부자를 꿈꾼다. 하지만 정작 일상에 쫓겨 돈모으는데 신경쓸 겨를이 없다. ◆생애재무설계는 재테크와 다르다

생애재무설계는 단순히 돈을 좇는 재테크와는 다르다. 재테크에는 뚜렷한 목표가 없다. 재테크 서적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종잣돈 1억원 만들기''100억원 만드는 법' 등은 돈을 버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반면 생애재무설계는 먼저 돈을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를 정한 뒤 거기에 맞게 돈을 모은다. '내집 마련'이나 '은퇴자금 모으기' 등 목표를 먼저 정한 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는 게 특징이다.

투자 기간에서도 커다란 차이가 있다. 재테크는 기본적으로 단기인 경우가 많다. 목표가 '1억원 만들기'라면 당연히 투자 기간은 10년이 아닌 3년이 바람직하다. 생애재무설계에서는 인생의 중대한 사건들인 결혼,출산,자녀교육,은퇴 등이 주요 재무 목표가 된다. 따라서 재테크에 비해 호흡이 훨씬 길다. 투자 자금도 단기,중기,장기 등으로 나눠 분산하는 게 옳다.

재테크는 주로 돈을 굴리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므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대상이다. 이에 비해 생애재무설계는 여유자금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대상이 된다. 오히려 부채가 많거나 지출 관리가 되지 않는 사람에게 더 요긴할 수 있다.

투자 방식에서도 차이가 난다. 재테크는 고수익을 위해 고위험 자산에 집중 투자하는 경우가 많다. 생애재무설계에서는 장단기 목표에 따른 자산 배분을 통해 주식,채권,부동산 등의 균형잡힌 포트폴리오를 구성한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마라'는 투자 격언은 생애재무설계에서는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다. ◆빨리 시작할수록 유리하다

생애재무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시간이 넉넉하면 넉넉할수록 유리하다. 바로 복리 효과 때문이다. 수익률이 연 8% 복리인 금융 상품이 있다고 가정해보자.이 상품에 1억원을 10년 동안 예치할 경우 원리금은 약 두 배가량인 2억1500만원이 된다. 만약 30년을 묻어 둔다면 원금의 10배인 10억원이 된다. 50년이면 무려 47억원에 가까운 엄청난 돈이 된다.

최초 원금 1억원이 두 배인 2억원이 되는 데는 9년이 조금 넘게 걸리지만 원금의 세 배인 3억원이 되는 데는 5년이면 가능하다. 4억원이 되는 시기는 그로부터 4년이면 충분하다. 이처럼 최초 투자금액의 배수가 되는 시기가 갈수록 짧아지는 게 복리의 마술이다. 금리도 중요한 요소다. '72의 법칙'에 따르면 72에서 금리를 나눈 숫자가 원금의 배수가 되는 대략적인 투자 기간이 된다. 즉 연 8%의 경우 72에서 8로 나눈 9년이 원금이 두 배가 되는 기간이다.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자가 나중에 웃는다.

◆목표설정 후 재무점검을

생애재무설계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목표 설정이다. 라이프 사이클을 학생기(10~20세),사회초년기(20~30세),가정구성기(30~40세),자녀성장기(40~50세),가족성숙기(50~60세),노후생활기(70세 이후) 등으로 나눠 각 사이클마다 주요 이벤트를 결정하는 게 좋다. 대표적인 이벤트로 결혼,내집 마련,자녀교육,노후준비 등을 꼽을 수 있다.

대부분 사람이 4가지 이벤트를 중심으로 재무 목표를 세운다. 예를 들어 '3년 뒤 결혼자금 3000만원','10년 뒤 수도권에서 내집 마련' 등의 식이다. 특히 놓쳐버리기 쉬운 '노후자금 마련'은 장기 과제로서 반드시 재무 목표에 포함시키는 게 바람직하다.

목표가 정해지면 먼저 스스로의 재무 상태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현재 소득과 지출 현황,보유하고 있는 재산 내역 등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현재의 재무 상태와 목표를 일치시키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이 과정은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하기에 어려운 점이 많다.

다행히 요즘 은행이나 증권사,보험사 등 금융 회사마다 재무설계 전문가(FP · Financial Planner)들이 있다. 이들 전문가와 고객 간 관계는 의사와 환자에 종종 비유된다. 즉 치료 전 꼼꼼하게 진단하고 그 결과에 따라 치료방법(투자방법)을 제안하는 이들이 바로 재무설계 전문가다.

◆전문가에겐 솔직하라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땐 솔직한 태도가 필수적이다. 재무 목표가 같더라도 자산,직업,가족,연령,투자 현황 등 각자의 처한 상황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전문가가 이에 맞는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문가가 자신의 자산 관리를 해주는 '재무 주치의'라는 신뢰를 갖고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좋다. 전략이 수립되고 나면 각자 그에 맞게 실행하면 된다. 다만 목표 달성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신상이나 금융 환경 등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을 경우 전문가와 협의를 거쳐 재조정해야 한다.

이호기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