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재판의 변수

판사 시절 소송당사자가 변호사 없이 혼자 민사재판을 수행하는 것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낀 적이 더러 있었다. 당사자는 제대로 증거를 대지 못하면서도 "하늘과 땅이 다 아는데 무슨 증거가 필요하냐"며 역정을 내기도 한다. 이런 답답함은 변호사가 최상의 증거를 찾지 못하고 변죽만 울려대도 마찬가지다. 이때 재판부가 증거 방법에 대해 시사라도 하다가는 공정치 못하다 해 기피당할 위험이 있다. 증거재판주의 하에서는 돈을 빌려주고도 차용증을 받아두지 않아 패소하기도 한다. 당사자로서는 법원이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 같은 변호사라 해도 실력이나 성의에 차이가 있고,이것이 승패에 연결되는 것이 재판이다. 이길 사건인데도 1심에서 패소했다가,2심에서 변호사를 바꿔 승소하기도 하는데,어려운 사건의 역전승에는 명의처럼 유능한 변호사의 적확한 진단과 처치술이 작용한다. 재판 결과는 판사들의 법에 대한 이해 여하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재판은 설득의 장이다. 판사를 자기 쪽 법논리로 설득해야 재판에서 이길 수 있다. 같은 사안에 대해 개개 판사들의 법적 관점에 따라 유죄 혹은 무죄가 되기도 하는 것을 '이현령비현령'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민주사회의 꽃은 상대성과 다원성에 있다. 분쟁의 종식을 위해 대법원이 최종적인 법률해석을 할 뿐이다.

어떤 행위가 불법이냐,잘못이냐 여부는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다. 시대의 흐름이 가치관이나 평가의 변화를 가져 온다. 그래서 종전에는 운이 없는 것으로 쳐서 그럭저럭 참았던 일이 이제 생활형편이 나아지고 권리의식이 깨어나면서 법정으로 사건을 가져간다.

방파제를 걷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너울성 파도에 휩쓸리거나,남의 집 앞에서 눈길에 미끄러져 다친 경우 종전에는 천재지변이나 자신의 잘못으로만 생각했다. 이제는 방파제에 안전난간을 설치하지 않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제때 눈을 안 치운 이웃의 잘못 여부를 따지게 된다. 최근 비행장과 사격장 인근 주민이 몇 천명씩 그룹을 지어 소음을 원인으로 하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주민의 쾌적한 생활이익과 국가의 재정 부담 증가 중 어느 것을 더 우선시킬 것인가 하는 정책적 판단 역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법이 보호해 주는 범위도 문화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필자의 독일 연수 시절인 1983년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불임을 위한 정관 수술 후 어쩌다가 임신이 되더라도 태어난 아이를 재판 대상으로 삼아 부양비를 청구할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독일에서는 이미 그 당시 원치 않은 아이의 존재가 법적 손해인지 여부가 다퉈지고 있었고,우리나라에서는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이 쟁점이 법정에서의 논란거리가 됐다.

필자도 법원의 판단을 받는 입장이 되어 보니,재판 불만이란 말이 피부에 와 닿는다. 이는 판사,변호사의 잘못에 기인한 바 크다. 다만 재판 불만을 해소함에 있어 이러한 재판과 법의 속성 내지 변수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이주흥 < 법무법인 화우 대표변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