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ART] 뉴요커 사로잡은 열정과 욕망…이제야 피카소 알겠지?

美 메트로폴리탄뮤지엄 '피카소展'

20세기 현대미술을 뿌리채 바꾼 입체파 시대 작품 등 300점 전시
변화와 혁신의 화풍 '한 눈에'

핏빛 하나 없이 창백한 광대가 수심 가득한 눈을 무겁게 내려 뜬 그림은 스페인의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년)가 20세에 그린 '앉아 있는 어릿광대'다. 애인과의 관계를 비관해 스무 살에 자살한 젊은 시절 단짝 친구 카를레스 카사헤마스의 애환을 생각하며 그려서인지 둔중한 애처로움이 느껴진다.

1903년 작 '눈먼 자의 식사'는 한 남자가 한 손으론 딱딱한 빵을 힘없이 쥐고 한 손으론 와인 병을 힘겹게 더듬는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잡아냈다.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20대의 젊은 피카소가 당시 겪은 가난과 슬픔을 예술로 형상화한 이른바 '청색 시대'의 회화 작품들이다.

피카소의 '청색 시대'(1901~1904년)뿐만 아니라 '장미 시대'(1904~1906년),'입체파 시대'(1906~1916년)의 작품 300여점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가 뉴욕 메트로폴리탄뮤지엄에서 열린다.

27일(현지시간)부터 8월1일까지 이어지는 '피카소'전에는 점당 수천억원대를 호가하는 유화 34점을 비롯해 드로잉 58점,판화 200여점이 걸렸다. 작품의 질이나 규모 면에서 단연 세계 최대 수준이다. 피카소의 92년 예술 인생을 시대순으로 찬찬히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하다. 두세 시간 걸으며 300여점을 감상하고 나면 피카소의 숭고한 미학에 대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1900년대 초 '청색 시대'의 우울한 감성은 피카소가 페르난데 올리비에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1904년부터 핑크빛 감성으로 바뀐다. 바로 '장미 시대'다.

'장미 시대'의 초기 대표작 '배우'(196×115㎝)는 3개월간의 복원 작업을 거쳐 이번 전시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1월 미술관 수업에 참가한 여성 관람객이 몸의 균형을 잃고 작품 위로 넘어지는 바람에 캔버스 오른쪽 하단 15㎝ 정도가 수직으로 찢겨졌던 작품이다. 분홍 옷과 푸른 장화를 신은 곡예사 차림의 배우를 강렬한 붓터치로 그린 것.부드러우면서도 육감적인 향취가 전시장에 가득 퍼지는 듯하다.

크라이슬러 설립자인 월터 크라이슬러의 장녀 텔마 크라이슬러 포이가 1952년 미술관에 기증한 이 작품의 가격은 1억3000만달러로 추정된다. 피카소의 가장 위대한 시기인 '입체파 시대'를 다룬 방에 들어서면 그가 어떻게 20세기 서양미술의 모양새를 뿌리째 바꿨는지 감지할 수 있다. 서양 미술사에서 피카소의 입체파 경향은 1907년에 그린 대작 '아비뇽의 여인들'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 작품은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전시에서는 만날 수 없다.

그러나 메트로폴리탄뮤지엄은 피카소의 가장 중요한 작품인 '아비뇽의 여인들'이 없다는 약점을 멋지게 극복했다. 입체파의 시작을 '아비뇽의 여인들'이 그려진 바로 전해인 1906년으로 놓고,그때부터 이미 피카소가 유럽의 고전미술 스타일을 깨부수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시 아프리카 가면에 빠져 있던 피카소는 1906년부터 사람 얼굴을 평면도형으로 쪼개 분석해 그렸다. 나무를 둔탁하게 깎은 아프리카 가면 같은 얼굴에서 피카소의 입체파는 시작되고 있었다. 피카소는 셀 수 없이 많은 여인을 만나며 그때마다 깊은 사랑에 빠졌다. 여인이 바뀔 때마다 작품의 경향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1923년 작 '흰 옷을 입은 여인'은 1918년 러시아 발레리나 올가를 만나 결혼한 피카소가 고전적 스타일로 되돌아간 '신고전주의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대표작이다.

피카소는 10대 때 이미 아카데믹 화풍을 버렸고,92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엔 판화에 심취했는데,다루기 쉬우면서도 목판화처럼 뚜렷한 이미지를 낼 수 있는 '리놀륨 판화'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했다.

이번 전시는 피카소가 전업 화가로 산 70여년 동안 단 한 번도 어느 스타일에 머문 적이 없었음을 확인시켜준다. 20세기 이후 현대미술이 얼마나 피카소의 영향권에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충분하다. 피카소가 18세 때 그린 자화상,그의 모델로 자주 등장한 슬픈 친구 카사헤마스의 초상화 등 잉크로 그린 작은 드로잉들조차 들러리가 아니라 피카소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작품이다. 언제부턴가 전 세계적으로 손에 넣기 쉬운 피카소의 후기 작품을 모아서 하는 상업적인 피카소 전시가 유행이다. 이런 전시를 평정하려는 듯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은 이번 특별전을 통해 이렇게 묻는다. "이제야 피카소를 알겠지?"

뉴욕=이규현 미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