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료라도 아끼자…영화사들 '생계형 동거'

투자수익률 4년 연속 악화
"과시보다 실속" 허리띠 '꽉'
공동 사무실 쓰며 시나리오 투자
"주차 시간당 2000원씩 추가로 내야 합니다. 1층 커피숍 손님들을 받아야 하는데,4층 영화사 손님들이 갑자기 늘어나 어쩔 수 없어요. "

중견 영화사 아이엠픽쳐스 사무실이 있는 서울 논현동 한 빌딩 주차요원의 말이다. 5층짜리인 이 빌딩에는 지난달 중순부터 출퇴근자가 20명 이상 늘었다. 곽경택 감독이 연출하는 전쟁영화 '아름다운 우리'(가제) 제작팀이 이 빌딩 4층에 있는 아이엠픽쳐스 사무실로 출근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우리'는 2차 연평해전을 소재로 한 3D영화로 100억원 규모의 대작이다. 아이엠픽쳐스는 '타짜''흡혈형사 나도열' 등을 만든 투자사이자 이 영화의 공동 제작사다.

'사랑따윈 필요 없어''원스어폰어타임' 등으로 손실을 본 후 구조조정 때문에 생긴 공간에 진인사필름이 신작 제작 본부로 들어온 것이다. 신작 제작에 들어가면서 새 사무실을 얻었던 영화계 관행과는 다른 패턴이다.

뿐만 아니다. '살인의 추억'을 공동 제작한 노종윤 노비스엔터테인먼트 대표,'잠복근무'를 만든 뮈토스의 김익상 대표,'가문의 영광' 공동 제작사인 씨네락의 권영락 대표,'테러리스트'를 찍은 선익필름의 임충렬 대표 등도 이 회사에 책상을 놓고 일한다. 이들은 모두 자체 사무실과 인력을 정리하고 이곳에서 단독으로 시나리오를 개발 중이다. 용산구 한남동의 한 사무실에는'김씨표류기'의 제작사인 반짝반짝영화사와 홍보대행사 딜라이트가 지난해 8월께부터 동거 중이다.

'김씨표류기'가 호평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한 뒤 반짝반짝영화사의 김무령 대표가 혼자 작품을 개발하면서 딜라이트의 장보경 대표를 비롯한 직원 5명과 사무실을 함께 쓰고 있다.

충무로에 있는 '실미도'의 투자배급사 시네마서비스 사무실에도 지난해부터 제작사 케이앤제이가 입주해 있다. 이처럼 영화사들이 뭉치고 있다. 영화계의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임대료를 줄이기 위한 조치다. 사무실을 폼나게 차리던 시대는 끝났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영화 시장 투자수익률은 2006년 이후 지난해 말까지 4년 연속 -20~40%를 기록했다.

지난해 제작 편수는 2008년과 비슷한 118편이었지만 10억원 미만의 저예산 영화가 전체의 54%를 차지했다. 영화사 수도 전년 대비 17%나 감소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강남에 사무실을 운영하려면 월 1500만~2000만원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매달 사무실 임대료 500만~1000만원에다 월 200만~300만원인 직원 3~4명을 고용하기 때문.사무실과 관리 인력에 들어가는 연간 2억원 안팎의 비용이면 2~3개의 시나리오를 개발할 수 있다.

김익상 뮈토스필름 대표는 "과시보다 실속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며 "영화사는 접었다가 필요에 따라 펴는 아코디언 같은 조직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시나리오 개발 단계에서는 사무실을 차리지 않았다가 제작에 들어가면서 사무실을 차리고 직원들을 채용하면 된다는 설명이다.

미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에 이미 제작자들의 공동 사무실제가 정착됐다. 제작자들이 공동으로 사무실을 쓰며 시나리오를 개발하다 제작에 들어갈 때 각자 조직을 펼치는 것이다. 할리우드에서도 '매트릭스' 제작진의 무술 연습장에 커피 머신마저 없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국내에서는 사무실 공동 이용뿐 아니라 제작과 투자를 공동으로 수행하는 일종의 지주회사도 생겼다. 집,보경사,오퍼스픽쳐스 등 3개 영화사는 지난해 150억원 이상을 들인 '전우치'를 공동 제작하기 위해 유나이티드픽쳐스를 설립했다. 한 투자회사 관계자는 "그동안 영화사들의 방만한 운영이 비판받아 왔는데 이 같은 비용절감 노력은 충무로 부활의 신호탄"이라고 말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