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흡연 직장인의 비애‥"한대 피우다 한대 맞겠네" 오늘도 눈물겨운 한모금

흡연자는 사회적 왕따?…옥상도 폐쇄, 건물 밖으로 내몰려
강력한 금연정책 인사반영도
말로만 금연구역?…사무실내 자욱한 연기에 절레절레
불만 쌓여도 기분상할까 말 못해

아직 담배를 끊지 못한 김 과장 이 대리의 하루는 고난의 연속이다. 직장 내에서 어느 샌가 소수파로 몰리면서 갈수록 설 곳을 잃고 있다. 심적 고통과 스트레스 치유의 안식처였던 사내 흡연실은 여성 휴게실로 둔갑해버린 지 오래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사무실이 있는 25층에서 1층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는 일도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회사 측이 흡연 여부를 인사고과에 반영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도 손은 여전히 담뱃갑으로 옮겨간다.

여기까진 그나마 참을 만하다. 흡연자를 마치 전염병 환자 대하듯 피하는 주변 동료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대할 때면 서럽고 억울하기까지 하다. 어린 자녀가 감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당신이 담배 펴서 그런다"고 매몰차게 몰아붙이는 아내의 잔소리는 그렇게 얄미울 수 없다. 출 · 퇴근길에서 여유롭게 한 대 빨던 여유도 사라졌다. 주변 학생 아줌마 아가씨들이 모두 멀리 떨어져 코와 입을 막고 죄인 쳐다보듯 하니 소위 말하는 사회적 왕따가 따로 없다. '이렇게 핍박받느니 아예 끊어버리자'고 일주일에도 몇 번씩 속으로 되뇌어보지만 말 안 통하는 '막무가내형' 부장 잔소리에 한 대,밀려드는 일거리에 또 한 대씩 피우다보면 어느 새 한 갑이다. 담배 한 대도 눈치보며 피울 수밖에 없는 김 과장과 이 대리.오늘을 사는 샐러리맨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사내 흡연 제발 'NO'

국내 모 중견 기업 마케팅팀은 회사 내 여직원들에게 기피 대상 1순위 부서다. 마케팅팀 내엔 계약직 여직원 자리가 하나 있는데,이 자리에 배치되는 여직원들은 1년을 못 채우고 회사를 그만두거나 아니면 다른 팀으로의 배치시켜달라고 하소연한다. 다른 부서에 비해 일이 특별히 힘든 건 아니다. 팀장이 지나치게 깐깐해 직원들을 못 살게 구는 스타일도 아니다. 다름아닌 팀장의 사무실 내 흡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엄연히 금연 건물로 지정돼 있다. 모든 직원들은 별도의 흡연실에서만 담배를 피우거나,사옥 밖에서 담배를 피운다. 그런데 금연규정이 엄격하지 않다 보니 별도의 사무실이 있는 임원들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운다. 이런 분위기를 등에 업고 마케팅 팀장 역시 사무실 안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이 사무실에는 팀장을 포함해 총 7명이 근무하고 있다. 담배연기에 비교적 익숙해져 있는 남자 직원들조차 환기가 잘 되지도 않는 사무실에서 팀장이 담배를 피우는 것에 대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마당에 여직원들 입장에서는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다. 팀에서 근무하던 한 여직원의 경우 결혼 후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날로 사표를 내기도 했다.

◆흡연 사각지역인 화장실대기업 총무기획실에 근무하는 김연태 과장(35).비흡연자인 그가 흡연자들에 대해 갖는 불만이 극에 달하는 곳은 화장실이다. 명목상 금연구역이지만 칸막이로 인해 본인의 신분을 감출 수 있어 화장실은 사실상 흡연구역이나 다름없다. 흡연자들의 양심에 맡긴다고는 하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피우기 시작하면 화장실은 금세 '너구리굴'이 되고 만다.

김 과장은 화장실 특유의 고약한 냄새보다 담배연기가 낫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 도가 지나칠 때가 너무 많다. 그러나 흡연자들 면전에서 "화장실에서 담배 좀 그만 피우라"고 할 수 없다. 흡연에 관해 정색을 하고 얘기를 하면 동료 간에 의가 상하기 때문이다. 그냥 "요즘 화장실에 담배 연기 너무 심해" 정도로 소심하게 얘기할 뿐이다. 김 과장은 "실내 금연이 정착되면서 흡연자들이 화장실에서나마 마음껏 담배를 피우며 묘한 쾌감을 느끼지만 비흡연자들의 고통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화장실 내 흡연이 문제가 되는 건 여자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흡연 여성 직원들 대다수가 남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정연 대리(27)는 "옷에 냄새라도 밸까봐 다른 층의 화장실을 이용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흡연 · 비흡연 동료 간 갈등 심화사내 흡연자와 비흡연자 간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도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흡연권'을 주장하는 흡연자들과 간접흡연 피해를 강조하며 '건강권'을 앞세우는 비흡연자 간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지고 있는 것."담배 냄새 때문에 일을 못하겠다"며 한두 평 남짓한 흡연실까지 없애달라는 건의가 끊이지 않고,사내 게시판에는 흡연자들의 잘못된 흡연행위를 지적하는 게시글이 하루가 멀다하고 올라온다. 대기업 계열사인 A사는 최근 층마다 설치됐던 흡연실을 폐쇄하고,마지막 흡연지역이었던 옥상까지 금연구역으로 지정하면서 흡연 직원들에게 불만을 사기도 했다.

광고기획사에 다니는 이민호 과장(36)은 "비흡연자들의 무리한 요구에 화가 나 흡연권을 보장해 달라는 글을 게시판에 올렸다가 며칠 동안 엄청난 댓글 포화에 시달렸다"며 "담배 피우는 게 자랑은 아니지만 흡연자들을 괴물 취급하는 동료들에게 서운하기도 하다"고 하소연했다.

◆비흡연자에겐 인사상 우대도

최근 중견 · 대기업을 중심으로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성 금연 프로그램도 가동되고 있다. 포스코는 정준양 회장 취임 직후인 작년 3월 말 금연 캠페인을 전개,같은 해 9월 말 본사와 출자사,주요 외주사 등 2만여명의 임직원 금연에 성공했다. 외형상의 성과이긴 하지만 적어도 회사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없다는 자체 평가가 나온다.

웅진그룹은 지난해 9월부터 전 계열사 본부장 이상 임원들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모든 임직원의 금연을 의무화했다. 웅진은 3년 전부터 금연서약서를 쓴 직원에 한해 40만원의 보조금을 지원한 데 이어 금연이 권고 수준에서 강제조항으로 바뀐 작년 9월부터 인사상 우대 등 적당한 보상책도 곁들이고 있다. 반도체를 생산하는 삼성전자 기흥공장도 실외 금연 조치가 시행 중이다. 점심시간과 업무 종료 후를 제외하면 전 사업장에서 담배를 피울 수 없다. 역시 담배를 피우려면 공장 밖으로 나가야 한다.

◆과도한 금연정책은 오히려 독약(?)

대기업 마케팅팀에서 일하고 있는 한민태 과장(38)은 건물 내 흡연을 금지한 회사 정책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갖고 있다. 사내 흡연실을 없애면서 직원들이 건물 밖에서 담배를 피우기 위해 허비하는 시간이 업무 효율이나 생산성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흡연자인 그는 업무 시간 중 담배 피우는 데 소요하는 시간만 1시간이다. 그는 오전과 오후 2번씩 28층 사무실에서 건물 밖 흡연지역으로 담배를 피우러 간다. 왕복 이동시간 10분에 담배피는 시간 5분을 합치면 담배를 피러가는 데 매번 15분이 걸린다.

한 과장은 "직원들의 건강을 챙기는 것은 좋지만 과도한 금연정책은 오히려 직원들의 업무 효율성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며 "담배를 피우러 가는 데 허비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사내에 시설 좋은 흡연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말했다.이정호/김동윤/정인설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