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해안 따라 243㎞…바람·파도가 만든 풍경

호주 '그레이트 오션 로드'
지구 반대편의 햇살은 어떨까. 가을이 깊어가는 멜버른행 여행가방을 꾸린다. 짐을 싼다는 건 설렘 가득한 여행의 '미리보기 버전'을 실행하는 것이다. 바람이 차지는 않을까. 낯선 풍경 속에 녹아든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달그랑달그랑 심장이 뛴다. 가방엔 달뜬 마음이 한가득 채워진다.

◆세월과 파도가 만든 예술작품'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몇 해 전 모든 직장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광고 카피.창밖으로 손을 뻗은 채 바람을 만끽하며 달리던 차에 당장 올라타고 싶게 만들던 그 풍경이 바로 '그레이트 오션 로드'다.

호주 멜버른에서 서쪽으로 1시간 반을 달려 만난 눈 시리게 넓고 푸른 바다. 절벽해안을 따라 쭉 뻗은 도로를 질주하다보면 어느 새 마음 속에 파란 하늘이 생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퇴역군인들의 일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시작했다는 243㎞의 길.그 대장정을 마무리짓는데 무려 13년이 걸렸다고 한다. 아마도 '그레이트'란 이름엔 자연의 광활한 아름다움과 함께 이들에 대한 존경심도 담겼으리라.

이 거대한 해변의 속살이 보고 싶어졌다.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바람막이 점퍼를 챙겨 입고 구불구불 해안 숲길을 걷기 시작한다. 걸을 수 있는 길은 91㎞.그레이트 오션 로드 중간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 '아폴로베이'에서 시작해 신이 만든 풍경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12사도상'에 이르는 하이킹 루트로 완주하려면 꼬박 6일이 걸린단다. 하얀 거품을 물고 세차게 달려와 이내 사라져버리는 파도.가슴 속까지 뻥 뚫리게 불어대는 바람.그 바람이 버거워 몸을 배배 뒤틀며 반쯤 누운 채 자란 나무들.키 작은 숲길이 아늑하지만 바람은 심술궂다. 모자가 날아갈까 봐 계속 머리로 손을 올린다. 완만한 경사에 지루하지 않은 풍경.목적지에 다다르는 것보다 걷고 있다는 그 자체가 더 의미 있는 시간들이 지나간다.

바다 위로 늠름하게 솟아오른 12개의 암석 기둥이 예수의 열두 제자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12사도상'.원래는 한몸이었던 해안절벽이 거친 파도와 세찬 바람,신경질적으로 쏟아지는 비에 깎이고 부서져 만들어진 것이다. 모진 풍파를 견디다 못해 지금은 8개만 남았다. 그 중 하나는 금방이라도 닳아 없어질 듯 위태롭다.

영국의 런던 브리지를 닮았다고 해서 똑같은 이름이 붙여졌지만,1990년 1월15일 저녁 갑작스레 끊어진 '런던 브리지'처럼 말이다. 이날 거대한 암석 일부가 붕괴될 때 해변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이던 두 남녀가 있었단다. 육지 연결부분이 끊겨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이들은 한 시간 만에 구출됐지만 밀려드는 인터뷰는 피해야만 했다고.짐작대로 불륜커플이었다는 얘기가 떠돈다. 좀 더 '그레이트'한 그레이트 오션 로드를 느끼고 싶다면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 보자.타기 전엔 꼭 숨을 크게 들이마실 것.'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신이 빚은 걸작… '그레이트 오션로드를 설명하는 화려한 수식어들의 향연이 과장이 아님을 확인하게 될 테니 말이다.

◆'롱블랙' 커피만큼 길고 진한 낭만

멜버른은 다양한 표정으로 여행자에게 말을 건다. 덜컹덜컹 도로 한가운데를 달리는 트램.중세 유럽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건물과 모던한 고층빌딩의 어우러짐.좁은 뒷골목마다 형형색색 화려한 그래피티.거리곳곳 활기와 낭만이 흐른다. 멜버른의 얼굴이라 불리며 지나는 사람 누구나 사진기를 꺼내들게 만드는 플린더스 스트리트 기차역을 건너 멜버니언들의 단골 약속장소인 페더레이션 광장에 발자국을 남기고 고딕양식이 고풍스런 세인트폴 성당 앞에 멈춘다. 초록 잔디밭에 도란도란 모여 앉은 사람들 곁에서 먹이를 쪼아대는 새가 비둘기가 아닌 갈매기라는 게 새롭다.

걸음은 안단테. 다른 여행지에서처럼 풍경하나라도 놓칠까봐 종종거리는 대신 노천카페에 느슨하게 앉아 오후의 여유를 만끽한다. 19세기 말 금광 발견 후 황금빛 꿈을 안고 건너온 이탈리아인들이 많아 커피문화가 상당한 수준이다. 메뉴판에 아메리카노가 없다고 당황하진 마시길.호주에선 에스프레소를 쇼트블랙(short black),에스프레소 샷에 뜨거운 물을 부은 커피를 롱블랙(long black)이라 부른다. 일반 커피잔에 담아내기 때문에 흔히 마시던 아메리카노보다 훨씬 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유난히 작고 클래식해 보이는 트램 한 대가 멈춰선다. 멜버른 시내를 느릿느릿 한 바퀴 도는 와인빛 '시티서클'에 오른다. 목적지는 정하지 않아도 좋다.

창밖의 풍경을 음미하다 마음을 당기는 곳이 있으면 그냥 내리면 그만일 뿐.어느 꽃미남 배우의 "바람과 흰 천만 있으면 어디든 갈수 있어"란 간지러운 대사를 떠올리며 말한다. "네모 반듯하게 잘 구획된 멜버른 시내에선 지도 한 장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멜버른=이명림 기자 jowa@hankyung.com


■ 여행 TIP멜버른은 호주 남동부 빅토리아주의 주도다. 시드니에 이어 호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200년 전의 골드러시 때 도시가 형성됐다. 1901년부터 1927년까지 호주의 연방수도이기도 했다.

트램을 이용하면 주요 관광지 어느 곳이든 쉽게 갈 수 있다. 한국과 계절이 정반대다. 한국보다 1시간 빠르다. 전기콘센트가 달라 어댑터를 가져가야 한다. 통화단위는 호주달러.현금매입 기준 1호주달러에 1025원 선.대한항공이 매주 월·수·금요일 멜버른 직항편을 운항한다. 호주빅토리아주관광청 (02)752-4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