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그리스위기 성급한 통화통합 탓

과도한 지출 줄일 내부역량 부재
FTA 관련 국내취약산업 지원을
그리스발 위기가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대공황 이후 최대라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겨우 수습되려는 시점에서 전 세계가 다시 새로운 위기로 끌려들어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스 사태의 본질은 무엇인가. 정부가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하고 민간도 그에 맞춰 과소비하면서 외국에 진 빚 갚을 능력을 의심받게 된 것이다. 과거 라틴아메리카의 외환위기와 닮은꼴이다. 물론 그리스가 유럽연합 공통의 유로를 쓰고 있기 때문에 '외환위기'는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문제 해결이 더 어렵다. 라틴아메리카식 외환위기는 과다한 지출이 문제이므로 재정 긴축을 필두로 지출을 줄여야 한다. 그럴 경우 당연히 내수경기는 악화된다. 이것을 완화시켜 줄 수 있는 것이 환율 상승이다. 이를 통해 자국의 상대적 물가수준을 낮춰 수출에서 수입을 뺀 순수출이 증가해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로를 쓰는 한 그런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물론 환율을 올리지 않고도 순수출을 늘리는 방법은 있다. 노사를 비롯한 이해 당사자가 합의를 통해 물가 수준을 낮추는 것이다. 노동자는 임금을 깎고 기업주는 생산물 가격을 낮추며 정부는 기업에 부담을 주는 행위를 줄이는 것이다.

유럽연합에는 그런 선례가 있다. 바로 독일이 그랬다. 1999년 유로가 출범할 당시 독일은 통일의 후유증으로 자국 통화가 과대평가된 상태였다. 따라서 다른 나라보다 물가상승률을 낮추었다. 독일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내부 역량 덕분이다. 노동조합은 임금 상승을 자제하고,기업가는 가격 인상을 하지 않았다. 그 바탕에는 기업 경영의 투명성과 노사협조를 가능케 하는 제도적 장치,정부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에는 그런 역량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당장 노동조합이 구조조정을 거부하고 있다. 그렇다고 노동조합만 나무랄 수도 없다. 위기 전 정부 주도로 흥청망청 쓰는 과정에서 국고 도용,권력 남용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긴축정책을 입법하는 의회 앞에서 시위대가 "의회의 도둑놈들 나오라"고 외치고 있는 실정이다.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그리스와 독일 같은 나라를 단일통화로 묶는 것이 무리였다.

정치통합으로 노동시장과 경제정책의 통합이 충분히 진행된 후에 통화통합을 하는 것이 맞았을 것이다. 그리스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금 같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국내적 갈등을 푸는 내부 역량을 기른 다음에 통화통합을 했어야 했다. 결국 그리스의 위기는 경제통합에 있어서 '순서'를 안 지킨 데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은 그리스처럼 통화통합은 안 했다. 그러나 경제통합에 있어서 순서를 안 지킨 경우는 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자본거래에 있어서 장기자본거래를 먼저 개방하는 것이 순서였지만,단기자본 거래를 먼저 개방한 것이 원인이었다. 그런데도 위기 후 그런 것은 고려하지 않고 자본시장을 전면 개방했다. 그 결과 2008년에 또 한 번 위기가 일어날 뻔했다.

한 · 미 자유무역협정을 비롯한 각종 자유무역협정에도 이런 문제가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미국이나 유럽연합과 같은 선진국과 경제통합을 할 때 피해를 보는 것은 앞으로 한국이 먹고 살아야 할 문화산업이나 의약품산업 등이다. 이런 산업에 대한 대책을 먼저 세우는 것이 순서지만,그것이 얼마나 지켜지고 있는가. 더 넓게는 우리가 가진 갈등 해결 능력에 비추어 '동시다발적' 자유무역협정 추진이 적절한 것인가. 장기적으로 경제통합이 바람직하다는 데 대해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순서를 지키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리스사태는 그런 사실을 다시 일깨워 주고 있다.

이제민 <연세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