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재산 110억 빼돌리려다…

동업자와 짜고 허위 차용증 작성
美법원 판결로 '진짜 빚' 둔갑…이혼하자 동업자가 '돈 갚으라'
2001년 미국에서 부인에게 이혼소송을 당한 김모씨(49)는 부인에게 줄 위자료와 재산분할분을 줄이기 위해 재산을 숨기기로 마음먹었다. 김씨는 사촌이자 동업자인 송모씨와 상의했다. 미국에서 이미 이혼한 경험이 있던 송씨의 조언(?)을 들은 김씨는 빚진 것처럼 가장해 재산을 일부 빼돌리기로 했다.

김씨는 미국에 소유한 주택 8채를 담보로 해 A사에서 돈을 빌린 것처럼 허위 차용증을 썼다. A사는 둘의 동업회사로 대표이사는 송씨다. 이것으로도 충분치 않다고 여긴 김씨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의 1심 법원에서 빚을 졌다고 스스로 인정,'승인판결(confession judgement)'을 통해 가짜 빚을 법적인 빚으로 못박기까지 했다. 이 판결에서 확정된 빚은 무려 970만달러,약 110억원이었다. 문제는 이후 불거졌다. 이듬해 김씨의 이혼이 마무리되자 송씨는 느닷없이 돌변,"빚을 갚으라"고 요구했다. 사촌의 약점(?)을 제대로 잡은 송씨는 승인판결에 따라 김씨의 법적 채권자가 된 A사를 원고로 내세워 2007년 서울중앙지법에 소송을 냈다. "미국 승인판결에 따라 김씨의 빚을 강제집행하게 해달라"는 게 송씨의 청구였다. 졸지에 거액의 허위 채무를 갚을 위기에 처한 김씨 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김씨는 법정에서 "문제의 승인판결은 재산분할 등의 집행을 면하기 위해 사촌 송씨와 공모해 작성한 허위 차용증에 의거한 것"이라고 실토했다. 그러나 1심과 2심에서 김씨는 모두 패소했다. 사촌의 '배신'에 맞서 김씨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허위 채무를 두고 사촌 간에 벌어진 '집안싸움'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지난달 29일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A사(송씨)의 손을 들어준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김씨가 가슴을 쓸어내렸을 법한 순간이었다. 재판부는 미국에서 받은 승인판결의 국내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민사집행법에 따르면 '외국 법원의 판결'에 기초한 강제집행은 대한민국 법원에서 집행판결을 받아내야 가능하다. 재판부는 "민사집행법상 '외국 법원의 판결'은 당사자에 대한 상호 간 심문이 보장된 상태에서 외국 사법기관이 종국적으로 한 재판"이라며 "(승인판결처럼) 심문의 기회 등이 보장되지 않았다면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심문을 하지 않은 채 이뤄진 약식재판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은 셈이다.

미국법에 따르면 승인판결은 원고의 신청이 있으면 사법기관이 관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법원 서기가 피고의 승인진술서와 대리인의 확인진술서 제출 여부만을 검토해 판결로 등록하게 돼 있다. 판결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긴 하지만 피고는 심문권 등 소송법상의 권리를 포기하고 소송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다.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