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전 인물열전] (2) 관중(管仲)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안다"

친구덕에 재상되어 30년 경제정치
제(齊)나라 환공(桓公)을 돕는 재상이 되어 그를 춘추오패로 만든 관중(管仲:?~BC 645)만큼 운도 따르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사람도 많지 않다. 그는 관포지교(管鮑之交)란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관중은 몰락한 귀족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빈곤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삶에 강한 의지를 갖게 됐다. 장사에 관심이 있어 어려서부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각 나라의 지형과 경제 상황에 대해서도 남다른 경험과 안목을 쌓았다. 절친한 친구 포숙아(鮑淑牙)와 함께 장사하다 실패하고,관직에서 세 번이나 쫓겨나고,전쟁에 나섰다가 패주하는 등 일이 꼬이기만 하는 상황에서도 포숙아가 늘 곁에서 버팀목 역할을 해주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관중과 포숙은 제나라 희공(僖公)의 눈에 들어 벼슬길이 열리게 된다.

두 사람은 두 명의 공자에게 각각 줄을 대기로 약속한다. 관중은 희공이 좋아하는 공자 규(糾)의 스승이 되고,포숙아에게는 희공이 별로 아끼지 않는 공자 소백(小白)의 스승이 되라고 권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관중을 이해해주던 포숙아도 힘 없는 소백의 스승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관중은 집요한 설득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그런데 희공의 뒤를 이은 형편없는 군주 양공(襄公)이 살해당하면서 왕위 쟁탈전이 일어나게 되자 관중과 포숙아는 자신들의 예비 주군을 위해 서로 싸우게 된다. 관중은 소백을 활로 죽이려고까지 했으나 오히려 소백이 왕위를 차지해 환공이 됐다. 관중의 운도 끝나는 듯했다. 관중은 노(魯)나라로 망명했다가 잡혀 제나라로 끌려왔다. 제나라로 압송될 때의 일화는 그의 인물됨을 잘 보여준다. 한 지방을 지날 때 배고프고 목말라하던 그에게 그곳을 지키는 벼슬아치가 다가왔다. 먹을 것을 들고 온 그는 관중에게 은밀히 물었다. "만일 제나라에 가서 죽지 않고 임용되면 무엇으로 저에게 보답하겠습니까?" 관중의 답은 의외였다. "나는 현명한 자를 쓰고,능력 있는 자를 등용하며,공이 있는 자를 평가할 것이오.내가 무엇으로 그대에게 보답하겠소?"

관중은 이렇게 능력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자신의 처지가 비참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강한 승부사 기질도 갖고 있었다. 죽을 운명이던 그는 포숙아의 천거로 살아난다. 포숙아는 "백성들의 부모처럼 인자하고 관대한 관중이야말로 환공이 천하를 제패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관중은 마흔에 재상에 올라 무려 30년간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재상이 된 그는 "창고에 물자가 풍부해야 예절을 알고,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안다"며 남다른 안목으로 경제를 중시하는 정치를 펼쳤다. 임금이 정책을 시행하고 형제간의 우애와 아버지와 아들 모두가 화해롭게 지내려면 일단 경제력을 갖춘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냉철한 현실 감각과 균형 감각이 있는 그에게 인의도덕이니 뭐니 하는 명분의 문제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기》 <관안열전(管晏列傳)>에 따르면 그는 재상이 되자 해안을 끼고 있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산물을 교역하고 축적해 부국강병에 힘썼으며 백성과 고락을 함께했다. 또 일의 경중을 잘 헤아려 득실을 저울질하는 데 신중했다. 결국 제나라 환공은 춘추오패가 됐다. 관중 역시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시황제에게 멸망당하기 전까지 동방의 전통 강국으로 성장시켰다. 그도 재산 불리기에 열중해 제나라 왕실만큼이나 재산이 많았지만 제나라 사람들은 그가 결코 사치스럽다고 여기지 않았을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가인박명(佳人薄命),재승박덕(才勝薄德) 등의 고사성어는 재능과 인품을 모두 겸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말해주는 예다. 가끔은 사소한 것쯤은 털어버리고 그 사람의 역량을 보고 인물을 뽑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포용력의 소유자 포숙과 융통적이고 현실적인 관중을 두루 갖춘 재상이 나온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말이다.

김원중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wjkim@ko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