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다시 보기] (2) 로마제국은 노예 덕분에 興했고 노예 때문에 亡했다

(2) 노예제도와 경제 부흥
로마후기 정복전쟁이 줄고 노예유입이 끊기면서 생산에 큰 타격을 입게 되고
로마 멸망후 소강상태였던 노예제는 18세기 설탕교역 활성화로 다시 부흥하게 되는데
도망 노비들과 이들을 쫓는 추노꾼을 소재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가 한참 인기를 끌었다. 오늘의 잣대에서 보면 인간이 인간을 소유하고 물건처럼 사고판다는 것은 인간성의 가치를 스스로 짓밟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육체적,정신적 노동력 착취를 본질로 하는 노예제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역사 속에 존재해 왔다.

만약 노예제도가 없었다면 세계사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고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발명품의 하나로 칭송 받는 아테네의 민주주의도 없었을 것이다. 아테네 전성기만 하더라도 인구의 30~50%는 노예들이었다. 이들이 대부분의 생산을 담당해준 덕분에 이른바 '민주적 시민'들이 직접 민주주의에 필요한 '시간소비적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로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럽 곳곳에 남아 있는 고대 로마 유적 중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름다운 타일로 치장된 목욕탕 시설이다. 로마인들의 목욕 사랑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지만 그들이 이 사치스런 문화를 즐기기 위해 반드시 필요로 했던 것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배수(排水) 기술이었다.

그런데 최고의 배수 기술을 가졌던 이 로마인들을 가리켜 "drain(배수)은 잘하지만 brain(머리)은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로마가 정작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는 특별히 고안해 낸 기술이나 장치가 없었음을 비아냥거리는 것인데 이는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런 로마가 세계적인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 부분 노예제도 때문이었다.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노예들이 생산을 전담했으며 이들은 전쟁을 통해 얼마든지 획득할 수 있었으므로 생산성 향상을 위한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로마가 멸망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노예제도 때문에 망했다는 분석도 꽤 유력하다. 로마가 팽창할 대로 팽창한 2세기 후반 이후에는 정복을 통한 노예 획득이 어려워졌다. 서쪽으로는 대서양,북쪽으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이르렀으며,남쪽으로는 아프리카 사막지대와 영토를 접한 로마가 이제 진출할 곳이라고는 동쪽밖에 없었는데 그곳에는 강력한 페르시아 제국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로 인해 로마는 심각한 노동력 부족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나 별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드라마에서 보는 우리 노비들과 달리 대부분의 로마 노예들에게는 가정을 이루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노예 양육이 난국을 타개할 하나의 방편이었지만 그렇게 하려면 돈이 많이 들고 또 과거와 같은 노동 강도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해서 그렇게 하지 않은 모양이다.

근대에 접어들자 노예제는 다시 부흥했고 18세기에 그 절정을 이뤘다. 16세기 서양에 첫선을 보인 설탕과 담배는 어느새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사치품이 됐다. 이들의 가치는 중국이나 인도에서 수입하는 그 어떤 상품보다 높았다. 유럽인들은 앞다퉈 이들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사탕수수는 자메이카와 바베이도스,생 도미니크(얼마 전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아이티)가 대표적인 집산지였고,담배는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에서 집중적으로 재배됐다.

문제는 이들의 재배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의 노예무역이 성행하게 됐다. 이 시기에 거래된 노예의 총수는 무려 900만명에 이른다.

노예무역은 주로 삼각무역 형태로 이뤄졌다. 예를 들면 영국의 리버풀에서 럼주나 거울 또는 값싼 인도산 면직물을 실은 배가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 가서 노예와 교환한다. 그리고는 이 노예들을 카리브해 또는 버지니아로 데려가 설탕이나 담배로 바꾸어 영국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1888년 브라질을 끝으로 노예제는 완전히 종식됐다. 그러나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를테면 20세기 후반 미국의 계량사가인 로버트 포겔은 노예가 미국의 경제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연구를 발표해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이 연구 덕분에 노벨상까지 받았지만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의 후손인 미국 흑인들은 쓰린 가슴을 달래야 했다.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