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구조개선약정] 강화된 평가기준…현대그룹 1조 현금 갖고도 '불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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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사이드]은행과 대기업은 매년 5월이면 홍역을 치른다. 재무구조개선 약정 체결을 놓고 연례행사처럼 실랑이를 되풀이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금호아시아나그룹과 산업은행이,올해는 현대그룹과 외환은행이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다. 현대그룹은 아예 대출금을 전액 갚고 주채권은행까지 바꾸겠다며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재무구조개선 약정이 뭐기에 매년 이 같은 갈등이 반복되는 것일까.
은행서 전년 재무제표 평가…불합격땐 가혹한 구조조정
기업 "신규투자ㆍM&A 걸림돌"…은행 "재무건전성 유지 예방책"
◆금감원의 은행업 감독규정이 근거은행이 대기업에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체결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금융감독원의 은행업 감독규정이다. 규정에 따르면 금감원은 매년 신용공여액(대출 및 신용한도 포함)이 금융권 전체의 0.1%가 넘는 기업군을 주채무계열로 선정하고(79조 1항),주채권은행으로 하여금 담당 주채무계열의 재무구조 개선을 유도(82조 3항)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금감원은 지난달 41개 대기업집단을 올해 주채무계열로 선정하면서 주채권은행으로 하여금 지난해 재무제표를 근거로 재무구조를 평가하도록 통보했다. 은행은 '주채무계열 재무구조개선 운영준칙'에 따라 매년 4월 말까지 정기평가를 실시하고,이로부터 1개월 이내인 5월 말까지 불합격 판정을 받은 주채무계열과 약정을 맺는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기업의 재무 건전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예방적 차원의 조치"라고 말했다.
◆'약정 체결=은행 관리',자율 경영 침해약정 체결 대상 대기업에는 가혹한 구조조정 목표가 부여된다. 우선 평가의 잣대가 되는 부채비율 감축 목표가 주어진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부동산 매각 △유상증자 또는 지배주주 출자 △계열사 및 보유 주식 처분 등을 포함한 자구노력과 차입금 상환 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출해야 한다. 계열사 통 · 폐합,사업 축소 계획도 내야 한다.
기업 입장에서 가장 큰 부담은 인수 · 합병(M&A)이나 해외 투자 등 신규 사업 제약이다. 중요한 영업활동에 변화가 생길 우려가 있는 경우 채권은행과 반드시 협의해야 한다. 은행이 월별 수지계획이나 결산 재무제표 등 회사의 주요 경영자료를 요청하면 이에 즉각 응해야 한다. 회사의 장부나 사업장에 대한 조사에도 적극 협조해야 한다. 대표이사와 사외이사,감사 선임 등 기업 지배구조 개선 계획서까지 제출해야 하는 만큼 기업으로서는 사실상 은행 관리를 받는 것과 다름없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행 실적이 부진한 대기업에 대해서는 신규 여신 중지는 물론 기존 대출의 만기 연장 중단과 여신 회수와 같은 제재 조치를 취하거나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작업)에 회부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기준 엄격
올해 약정 체결 대상으로 확정된 주채무계열은 모두 9개다. 지난해 약정을 맺은 동부 한진 애경 금호 유진 대한전선 등 6개를 제외하면 논란을 빚고 있는 현대그룹과 성동조선 SPP조선 3개다.
문제는 매년 재무평가 기준이 달라져 일관성이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지난해 조선업체들은 선수금이 부채로 잡히는 업종 특성이 반영돼 대상에서 제외됐지만 올해는 구제를 받지 못했다. 특히 올해는 평가 기준이 대폭 강화돼 평가 대상 기업들의 불만이 컸다. 부채비율 산정을 위한 자기자본에 계열사 간 유상증자 금액을 빼도록 기준이 바뀌었다. 지난해에는 부채비율이 200% 미만이면 100점 만점의 재무평가에서 40점만 넘으면 합격 판정을 받았으나 올해는 50점은 넘어야 통과할 수 있다.
채무 상환 능력을 나타내는 이자보상배율 배점도 지난해 25점에서 올해 50점으로 2배로 높아졌다. 총자산 회전율이 새로운 평가지표로 들어오는 대신 유동성 지표인 유동부채 대비 현금성 자산(10점 배점) 항목은 평가 대상에서 빠졌다. 현금만 1조원 넘게 보유한 현대그룹은 가점을 받을 수 있는 항목은 빠지고,부채비율이 높은 해운업의 특성은 반영되지 않아 불이익이 커졌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약정 체결을 빌미로 매년 은행이 대기업의 군기를 잡는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비밀유지 안돼…신용도 추락 부작용
대기업의 또 다른 불만은 금감원과 채권단의 희박한 보안의식으로 인해 약정 체결 대상 기업들의 명단이 곧바로 시장에 노출된다는 점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구체적인 약정 내용은 물론 약정 체결 여부도 철저히 비공개가 원칙"이라고 했지만 이 같은 원칙이 지켜진 예는 거의 없다는 게 기업들의 시각이다.
지난해 약정을 체결한 A사 관계자는 "약정 체결 사실이 알려져 주가 하락과 신용도 추락,제2금융권의 자금 회수 움직임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며 "그렇다고 해서 정부나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고 하소연했다.
여기에다 △지배구조 위험 △주력 계열사의 업황 전망과 영업실적 추이 △우발채무 위험 등 비재무적 요인도 주채권은행이 자의적으로 판단,분쟁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기업들의 볼멘소리에도 불구하고 금융당국과 은행의 입장은 확고하다. 현대그룹과의 분쟁 당사자인 외환은행 관계자는 "약정 체결 방침은 외환은행 외에 신한은행과 산업은행 농협 등 신용공여액이 많은 3개 은행이 참여한 재무구조평가위원회에서 결의한 사안"이라며 "현대그룹의 주장에 대응할 필요를 못 느낀다"고 일축했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도 "약정 체결은 기업의 재무구조를 더 좋게 변화시켜 위기시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라며 "평가 기준의 변경도 기업의 재무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