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중국은 진정 '책임없는 小國' 될 터인가

북한 껴안기 전략은 부끄러운 일
인류 보편 가치라야 동북아평화
중국 사람을 만나면 종종 받는 당혹스러운 질문 중 하나는 서울의 경복궁과 베이징의 자금성을 비교해 달라는 것이다. 이 도발적 주제는 질문자의 의도와 달리 대체로 중국인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답변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풀 한 포기 없이 거대 콤플렉스 덩어리일 뿐인 청국의 자금성과 아름다운 산자락에 기대 있는 조선의 온화한 경복궁을 어떻게 직접 비교할 것인가. 평야에 건설한 높은 성벽의 천안문과 산곡을 끼고 돌아가는 광화문 역시 비교가 어렵다. 외환을 맞았을 때 내부의 배신자가 먼저 열어젖히는 문인지,밖에서 부숴뜨리고야 비로소 열리는 문인지도 토론 거리를 남긴다. 베이징의 현대식 건물들도 다를 것이 없다. 중후장대한 빌딩들로 채워지고 있는 장안대로는 너무도 고압적이어서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조여들게 만든다.

오늘의 중국인들이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중국은 역사의 오랜 시기를 '중화'라는 가치를 추구해온 나라다. 중국이라는 칭호를 얻은 것도 2000년이 넘었다. 동중서가 유교를 국교로 만들고 중화와 사이(四夷)를 구분한 것이 아마 그 시작점이었다. 두 번의 밀레니엄 동안 아시아는 유교 이념과 질서를 보편적 가치로 받아들였다. 중국은 문명국이며,따라서 발전의 모델이며 대부분은 불편부당한 보편국가였다. 그런 국가를 천하국가라고 불렀다. 폭력 아닌 문치(文治)였기 때문에 황제의 자리는 어느 민족의 누구라도 취할 수 있지만 곧바로 스스로 동화하고 마는 멜팅 폿이었다. 그래서 아시아가 모두 중국의 이념적 사상적 지적 구조물 전체를 수용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자금성과 경복궁을 비교해 달라는 질문의 그 어디에서도 중화로서의 중국을 발견할 수는 없듯이 지금 북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중국의 외교적 수사 어디에서도 중화를 발견하기 어렵다. 중국은 여전히 아편전쟁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청국일 뿐이며 근육을 키우고 있는 미성숙한 개도국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연초에 후진타오 주석은 "중국은 이제 '책임 있는 대국'(責任的大國)이 되겠다"고 말했다. 서울 주재 중국대사도 이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책임이라는 단어는 사라지고 대국이라는 공허한 단어만 남는 것 같다.

가치 없는 대국주의는 인근국들에는 물론이고 자신에게도 비극이다. 대국은 보편적 이념과 원칙으로 완성되는 가치 있는 국가의 다른 말이다. 그 어디에도 좁은 골목길의 얄팍한 계산속이 정당화되는 일은 없다. 테러가 정당화되는 일은 더욱 없다. 중국이 '책임'이라고 부르는 것이 골목길 깡패의 등을 두드려주는 정도를 말한다면 중국은 또 하나의 문제 국가일 뿐이다. 그런 중국을, 세계는 물론 동북아 인근국들도 책임 있는 국가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핵무기 공갈이며,독재와 권력 세습이며,국민을 굶주리게 하며,금강산 투자 기업의 재산이나 강탈한 끝에 기어이 잠수함으로 어뢰나 쏘아대는 테러집단의 광기에 사로잡힌 독재자를 옹호하거나 수용하는 것은 그 어떤 원칙으로도 가능하지 않다.

중국의 책임이 냉전적 편갈이를 옹호하는 전략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북한을 방패 삼아 은근히 위력을 과시하는 듯한 낡고 옹졸한 전략은 실로 유치하다. 만에 하나 북한을 방패 삼아 동북아에서의 레버리지를 유지하기로 든다면 이는 깡패를 전위로 내세우는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남과 북이 모두 자제하기를 바란다'는 따위의 어설픈 중재자 노릇이나 고졸(古拙)한 대국 흉내는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렵다. 테러 정권의 후원자를 자처하는 동안은 중국은 결코 천하 국가로 인정받을 수 없다. 중국은 지금이야말로 책임 있는 대국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라는 점을 간과하지 말기 바란다. 김정일을 버려야 동북아의 평화를 얻는다. 중화다운 국가 전략이 필요한 때다.

논설위원 겸 경제교육硏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