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탈북여성 박사1호 이애란 교수 "北 비위 맞추기 더는 안돼"
입력
수정
"천안함은 넘지말아야 할 線 넘은 비극"
'탈북여성 박사 1호'인 이애란 경인여대 식품영양조리과 교수(47 · 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장)는 한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새터민(탈북자)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지난 3월에는 탈북 여성들을 도운 공로로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으로부터 '용기 있는 국제 여성상'을 수상해 주목을 받았다. 서른네 살에 화장실 청소,보험 판매 등 남한 사회 밑바닥서부터 다시 시작해 이룬 기적에 대한 보상이었다.
지난 27일 서울 낙원동의 연구원 사무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인터뷰 중 "한국에 와서 너무 많은 기회와 혜택을 누렸고 큰 상까지 받은 만큼 내 직분에 맞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미국에서 상을 받을 때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국제무대에서 내 얼굴만 봐선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잖아요. 한국인이 상을 받는다는 것을 잘 나타내려면 한복을 입고 나가자고 생각했죠.마침 그날 제 분홍색 한복과 미셸 오바마 여사의 보라색 의상이 너무 잘 어울려서 클린턴 장관과 주변 사람들이 '뷰티풀(beautiful)'을 연발했어요. 영부인도 막 만져보기까지 하면서 한복에 감탄했습니다. 한국 문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느껴지는구나 하고 자부심을 많이 느꼈어요. "
▼탈북 후 남북 교류의 물꼬가 터졌다가 최근엔 천안함 사건으로 경색됐는데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저도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탈북자를 대표해 말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동안의 관계가 교류협력보단 북한 비위를 많이 맞춰 준 것이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가 일부 국민들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비위를 맞췄는데도 그 사람들(북한)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많이 넘었지요. 북의 평범한 주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갔다면 모르지만 그것도 아니잖습니까. 우리가 쏟은 열정,정성,돈이 무색해진거죠.과연 이게 합리적,효율적이었는지 중간점검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입장에선 아픈 일이지만 종기를 쨀 때는 째야 합니다. "
▼새터민으로서 천안함 사태를 보는 심정이 착잡할 텐데요.
"자식 잃으신 분들은 얼마나 속상하시겠어요. 우리(새터민)는 그쪽 체제가 싫어 죽음을 각오하고 넘어온 사람들이에요. 북한이란 나라에 한때나마 몸담았던 게 수치스럽고 남쪽 국민들께도 죄송한 부분이 있어요. 저도 여기 올 때 물이 목까지 올라오는 압록강을 4개월짜리 아들을 업고 건넜어요. 오죽 그 체제에서 미치도록 벗어나고 싶었으면 차가운 강물에 핏덩이를 안고 뛰어들었겠습니까. "▼1997년 남한에 정착한 뒤 고생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개인이 느끼는 어려움은 다 같아요. 각자 극복해야죠.저도 처음엔 눈물을 많이 흘렸고 우울증에도 시달렸어요. 하지만 돌아보면 사람은 어려움 속에서 더 많은 지혜를 얻게 되니 고생이 다 나쁘진 않은 것 같습니다. 또 우리나라는 스스로를 잘 관리하고 어려움을 헤쳐나가면 여러 기회가 많아 그런 점에 감사해요. 북한에선 국가가 정해주는 직장에 6개월 안 나가면 형법을 위반한 '무직건달자'로 감옥에 가지만 여긴 국가가 간섭하지 않습니다. (웃음) 여기가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저도 다른 일을 하다가 박사학위도 받고 교수도 할 수 있었어요. "
▼새터민 정책에 개선해야 될 부분은."많지요. 정부가 탈북자 정착에 노력을 많이 하고 돈을 분명 많이 씁니다. 하지만 남쪽 사람들이 주도해 탈북자를 1 대 1로 상대하는 시스템이다보니 효율이 낮아요. 정부와 시민단체가 측면지원을 계속하되 탈북자가 탈북자의 정착을 돕는 시스템으로 바꿔가야 합니다. "
▼연구원도 그런 취지에서 만드셨죠.
"탈북자들 일자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탈북자가 남쪽에 와서 그냥 한식,양식 조리사 자격증만 따서는 경쟁력이 없어요. 우리 연구원에서 이 자격증을 다 따게 한 다음 북한요리를 특화해 가르치면 취업 경쟁력이 높다고 봤습니다. 지난해 탈북자들의 직업훈련 교육 수요를 연구했는데 요리 교육을 원하는 사람이 30%나 됐고 그걸 우리가 충족해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더구나 북한에서는 지금 식량난 때문에 사라져 버리는 요리가 많아요. "
▼북한 음식에 철저히 특화하는 건가요.
"한식 세계화를 위해 많은 곳에서 노력하고 있는데 여기에 북한의 음식도 많이 포함되도록 기여하자는 것이죠.통일이 이뤄지면 하나가 될 거라는 걸 대한민국 이미지에 담을 수 있을 겁니다. 북한 요리를 발굴하고 연구해서 시장에 상품으로 내놓을 거예요. 우리 연구원이 잘 하면 수요가 생길 거라 생각합니다. "
▼사업이 아직 초기단계라 운영하기 어렵지 않나요.
"어려워요. 제가 머리가 하얗게 셌습니다. 사장이 돈 많이 벌어 직원 월급 빵빵하게 줘야 위신이 서는데 위신이 없어요. 탈북자들은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약간의 생계비는 지원해줘야 교육을 시킬 수 있어요. 주변에서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수익을 많이 내야 공익에도 기여할 수 있는데 수익을 빨리 못 내니 사업이 어렵다는 걸 절감합니다. 박사는 자기가 노력하면 되지만 사장은 노력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더군요. "
▼남한과 북한 요리가 많이 다른가요.
"남쪽에 와서 음식을 먹어보니 양념을 너무 많이 해서 원재료의 맛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습니다. 대구탕,동태탕,해물탕,보신탕에 큰 차이가 없고 그 맛이 그 맛이에요. 북한 음식 중에는 아직까지 양념 많이 넣은 것이 없습니다. 동태탕을 끓이면 동태맛이,대구탕은 대구맛이 나야 하는 것 아니에요? 저희 연구원에서 그런 것들은 확실히 차이 나게 가르쳐드릴 수 있습니다. "
▼남한 여성들이 배워볼 만한 북한요리를 추천한다면.
"'닭다리 주머니찜'이라는 게 있어요. 닭고기와 여러 채소를 잘게 다져 섞어 닭껍질에 싸서 튀깁니다. 모양은 닭다리와 똑같이 생긴 데다 뼈가 없으니 더 점잖게 먹을 수 있고 영양도 고급이죠.또 북쪽 지방에는 명태순대,오징어순대,돼지고기순대 등 다양한 종류의 순대가 많습니다. 고춧가루 양념 없이 간장으로만 비비는 해주비빔밥이나 베이징덕과 비슷하면서 가격은 싼 칠향닭찜처럼 몰라서 그렇지 특별 요리들이 많이 있지요. "
▼북한에서 출신성분 때문에 정치경제학 대신 식품을 전공했다고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평양외국어대 중학교반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당시엔 외교관이 되고 싶었죠.중학교 입학 전인 11살에 조부모의 월남 사실이 밝혀져 온가족이 양강도로 추방당했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자기가 접하는 것에 따라 꿈이 달라지잖아요? 전 제가 갖고 있는 꿈에 제약이 있다는 걸 알아버렸고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가 없게 됐어요. 출신성분 제약을 덜 받으려면 연구하는 학자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낭만적인 아이에서 현실적인 아이로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
▼그래도 이쪽 분야에서 전문가의 위치를 굳혔잖습니까.
"운명이어서 할 수밖에 없었고,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 나쁘지 않았어요. 최선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운명의 장난으로 왔지만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통일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남한에는 경제적 비용 때문에 통일을 꺼리는 사람도 있는데 전 안타깝습니다. 언제 통일이 되든 혼란이 있고 비용이 들 거예요. 그런데 그건 늦어질수록 더 커집니다. 세대가 지나면서 문화차이가 벌어지고 소통을 위한 사회적 비용이 높아지고 있어요. 남북한 경제수준이 비슷한 1960~1970년대에 합쳤으면 비용은 거의 없었겠지만 이미 너무 지났습니다. 전 통일전문가는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보면 그런 것 아닌가요. "
임현우/정태웅 기자 tardis@hankyung.com이애란 교수는
이애란 교수는 1964년생으로 고향은 평양이다. 11살 때 '월남가족'이라는 이유로 일가족이 양강도로 추방당했고 혜산에서 고등중학교를 마쳤다. 신의주경공업대 식품공학과를 졸업한 뒤 우리나라의 식약청에 해당하는 과학기술위원회 식품품질감독원에서 10여년 근무했다. 1997년 남편을 제외한 가족 9명과 함께 탈북, 중국과 베트남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이후 서울 영등포에서 건강음식전문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종미 이화여대 식품영양학과 교수의 권고로 2001년 대학원에 입학,공부했다. 2003년 '남한거주 북한이탈 주민의 식생활 행동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지난해엔 '1990년 전후 북한 주민의 식생활 양상 변화'를 연구, 새터민 출신 중 세 번째,탈북여성으로는 첫 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9월 사단법인 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을 설립해 원장을 맡고 있다. 현재 경인여대와 이화여대에서 강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