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백만장자

'천석꾼은 나라가 내리고 만석꾼은 하늘이 내린다'는 말이 있다. 한석은 벼 한 섬,쌀로는 두 가마니를 뜻하니 천석꾼은 1년에 쌀 2000가마,만석꾼은 2만가마를 수확하는 거부다. 대다수 백성들은 쌀밥을 실컷 먹어보는 게 소원일 정도로 궁핍한 세월을 살아왔으니 만석꾼을 하늘이 내린 부자로 여겼을 법 하다. 1930년 일제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천석꾼은 750여명,만석꾼은 40여명에 불과했다.

요즘 부자 소리를 들으려면 재산이 얼마나 돼야 할까. 부자학연구학회에선 총재산 30억~50억원,현금성 자산 10억원 이상 가진 사람을 부자로 본다. 이런 조건을 갖춘 부자는 한국에 25만여명,일본에 150여만명 정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선 부동산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거액의 현금을 갖고 있는 경우가 생각보다 적다고 한다. 투자은행 메릴린치와 컨설팅회사 캡제미니는 2008년 기준 100만달러 이상의 현금성 자산을 소유한 한국인을 10만5000여명으로 추산했다. 심한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세계 백만장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는 소식이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2010 세계 부(富)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부동산 골동품 등을 제외한 유동자산 100만달러 이상을 보유한 부자는 1120만가구로 전년에 비해 14% 증가했다고 한다. 2008년엔 전년에 비해 14%가 줄어 980만가구를 기록했었다. 가구수 대비 백만장자가 가장 많은 나라는 싱가포르로 전체의 11.4%나 됐고 홍콩(8.8%),스위스(8.4%)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미국은 4.1%로 7위에 머물렀으나 전체 백만장자는 472만가구로 가장 많았다.

'부자학' 강좌를 개설한 한동철 서울여대 교수는 부자들의 일생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 단계는 지독한 절약이고,두 번째는 절약을 통해 마련한 자금으로 사업이나 투자를 하는 단계다. 그렇게 부를 이루면 종교 · 사회단체를 통해 기부하고 봉사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경주 최부잣집이 오랜 세월 나눔의 철학을 지켜온 것이나 빌 게이츠가 기부를 즐거움으로 여기는 것과 통하는 얘기다.

'부자는 많은 사람의 밥상'이란 속담이 있다. 주변 사람에게 크든 작든 도움이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우리사회엔 부자를 질시하고 폄하하는 시각이 존재한다. 하지만 떳떳하게 벌어 뜻있게 쓰는 부자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이런 부자는 많을 수록 좋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