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사실주의 화풍으로 40년 이상 시간의 궤적을 그린 까닭은…

5년만에 개인전 여는 이석주씨
"제가 화면에 그리고 싶은 것은 시간입니다. 예전에는 시계 이미지로 시간을 표현했는데 지난해부터는 시계 대신 낡고 오래된 책의 이미지로 바꿔 그리고 있어요. "

16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개인전을 갖는 중견 화가 이석주씨(58 · 숙명여대 교수)는 "그동안 작품 소재였던 말(馬)이나 시계 이미지에서 벗어나 책을 통해 현실과 초현실 세계가 공존하는 시간을 잡아내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씨는 대상을 사진처럼 정교하게 화면에 옮기는 극사실주의 화풍의 국내 대표 작가. 한국 현대 연극의 선구자인 부친 이해랑 선생(1916~1989년)의 사실주의 무대와 맥을 같이한다. 부전자전의 예술 정신은 화가인 딸 사라씨까지 3대째 이어지고 있다.

5년 만에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신작 30여점이 걸린다. 극사실이면서도 살바도르 달리,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초현실 세계의 낭만이 담겨 있다. 그는 왜 화업 내내 극사실로 시간을 묘사하는데 집착하고 있을까.

"시간은 현대인들에게 피할 수 없는 구속을 의미하지요. 하지만 기억의 앙금들을 건져올려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켜주죠.책은 기억의 저편을 향해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그는 극사실주의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부친의 삶과 연결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아버님은 연극을 하시면서 평생 '리얼리즘'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셨거든요. 흘러간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려내야 한다는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맴돕니다. 한때 오브제 철판 작업 등 다양한 시도를 해봤지만 저한테는 안 맞았어요. "

그는 다만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일어난 회화와 조각의 새로운 경향인 극사실주의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저에게 극사실주의라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는 없습니다. 미국적인 '하이퍼 리얼리즘'과도 다른 그림이고요. 흔히들 극사실주의에서는 정밀 묘사를 잘하면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하는데 정밀 묘사는 방법적인 문제이지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

데페이즈망(Depaysement · 이질적인 대상의 결합) 기법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그의 작품에는 구겨지고 낡은 책 옆에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나 앵그르의 '오달리스크'처럼 익숙한 명화 속의 여인 이미지가 함께 등장한다. 모순되거나 대립되는 요소들을 동일한 화면에 결합시키거나 특정 사물을 전혀 엉뚱한 공간에 놓아 시각적 충격과 신비감을 자아낸 것.시간이란 개념을 살려내기 위해 친숙한 대상을 화폭에 집어넣는 '엉뚱한 결합'을 즐긴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작품의 변화는 재료의 변화를 동반하고 있다. 아크릴 물감을 바른 뒤 끈적끈적한 유화 물감으로 오돌토돌하게 처리한 갈색조의 표면이 한층 포근해졌다.

이전의 작가가 고뇌하는 사색가였다면 이제는 자연과 인생을 노래하는 시인의 모습이다. (02)734-0458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