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과학적 가설과 정치적 믿음

전문성 떨어지는 '천안함' 의혹
실험 통한 합리적 비판 아쉬워
한국의 한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지난 10일 국제연합(UN)에 보낸 '천안함 서한'은 국내에 갈등의 회오리를 불러일으켰다. 한국 정부가 주도한 국제적 조사단의 발표(5월20일)를 20일 만에 의심스럽다고 들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사단의 발표나,그에 대한 비판을 보면 양쪽 모두 '과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서로 다른 논리를 펴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그만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과학기술로 도배돼 있다. 이번 천안함 사건만이 아니라 그에 앞선 여러 일들이 모두 과학기술의 문제이지 않았나. 나로호 발사가 그러하고,4대강 개발이나 한반도 운하,또는 새만금 같은 일들 역시 마찬가지다. 얼마 전의 광우병 파동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었던가. 최근 우리는 외국에 원자력 발전기술을 수출하게 됐다고 기뻐했지만,20여년 동안 우리는 그것과 절대적으로 연관된 방사능폐기장조차 찾지 못해 소동을 일으켰지 않았나. 과학기술의 문제는 대중의 관심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일은 더욱 자주 생길 것이다. 인류 사회는 날로 과학기술 의존도를 더 높여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의 과학기술 문제는 몇 세기 전과 달리 지극히 복잡하다. 천안함 사건만 해도 거기에는 기계,금속,화학 등의 과학과 공학적 과제는 물론이고,심지어 의학 문제도 들어있다. 당연히 그 조사에는 대규모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 이번 민관합동조사단의 경우 적지 않은 인원이 참가했고,러시아와 중국까지 조사원을 보냈다니 감시의 눈이 여럿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에 비하면 참여연대의 8개항 문제 제기에서 드러난 전문가는 재미 물리학자 한 명 정도인 듯하다. 지난 22일 조사단은 그 재미 과학자의 실험 잘못을 지적하기도 했다.

오늘의 과학은 3세기 전 근대과학이 처음 일어나던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그런데 그 초기의 과학에서도 방법론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논쟁이 있었다. 예를 들면 근대과학의 창시자랄 수 있는 아이작 뉴턴(1642~1727년)은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고 선언한 적이 있다. 그가 중력 법칙을 설명한 책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또는 《프린키피아》)를 낸 때는 1687년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 대해 많은 과학자들은 비판적이었다. 그의 '중력'이란 우주의 모든 것들 사이에는 거리와 질량에 관련된 힘이 작용한다는 것인데,그 중력이 다른 과학자들에게는 마술 같은 황당한 힘 같았기 때문이다.

뉴턴은 1713년 《프린키피아》 재판을 내면서 이런 비판에 대해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며 반박하고 나섰던 것이다.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힘(즉 중력)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자기의 '중력'은 가설이 아니라,현상으로부터 얻은 결론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뉴턴은 관찰한 자연 현상으로부터 추론해 얻은 결론만으로 중력 법칙을 발견했을까. 꼭 그렇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뉴턴의 가설이 아니라 오늘 한국인들의 가설지향성이다. 지금 우리는 모든 현상을 자기의 가설에 맞춰가려 노력하는 것은 아닐까. 3세기 전 뉴턴은 바로 그런 거꾸로 가는 과학을 옳지 않다고 비판했는데….아니,오늘 우리의 문제는 과학적 가설이 아니라 정치적 믿음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지키기 위해 과학적 자료를 활용한다. 과학이 아직도 우리 문화로 뿌리내리고 있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관찰과 실험을 통해 우리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비판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습관,즉 과학적 태도를 길러야 한다. 자기 주장이나 믿음을 뒷받침하기 위해 과학을 써먹으려는 태도는 과학적인 게 아니다.

박성래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