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 회사에 사망선고" 기업 구조조정 갈등 확산

현대그룹 "업종 특성 무시"…대선건설 "현금 상환능력 충분"
채권단 "평가기준 따랐을 뿐"
채권단의 신용위험도 평가 결과에 기업들이 잇따라 반발하고 있다. 기업들은 "은행들이 일방적인 잣대를 적용,정상적으로 굴러가고 있는 회사에까지 사망선고를 내리고 있다"며 승복할 수 없다는 태세다. 반면 은행들은 "정해진 기준대로 할 뿐"이라며 평가를 번복할 계획이 없다고 맞서면서 기업구조조정을 둘러싼 잡음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연체,우발채무 없는데도 D등급하나은행이 주채권은행인 대선건설은 지난달 신용위험도 평가에서 퇴출대상인 D등급을 받았다. 이 회사는 그러나 건설사 재무구조의 악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을 받거나,지급보증을 한 적이 없다. 대출금을 연체한 적도 없다.

이유가 있다면 여신이 900억원으로 유동자산(148억원)에 비해 과도하다는 것이다. 회사 측은 그러나 "대주주인 신준호 회장 명의의 예금 862억원이 담보로 잡혀 있어 차입금을 갚지 못할 가능성은 제로"라는 입장이다. 신 회장은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막내 동생으로 2005년 이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 측은 "어음을 발행하지 않아 부도가 날 이유가 없고,지급보증과 같은 우발채무도 없다"며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A회계법인 관계자도 "차입금 대부분에 대해 담보가 있고 대주주가 지급보증을 했기 때문에 부도 가능성은 없다"며 "은행이 돈을 받을 수 있느냐는 측면에서 보면 이 회사를 퇴출시킬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그러나 총 자산이 960억원인 데 비해 지난해 경영실적은 매출 13억원,영업손실 17억원을 기록했다. 은행 관계자는 "담보가 있더라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차입금을 갚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며 "대출금 900억원 중 800억원을 중국에 '몰빵'하는 등 리스크 관리에도 허점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감독당국 압박이 무리한 평가 원인(?)

금융권에서는 '대선건설 케이스'가 발생한 원인으로 금융당국의 압박을 지적하고 있다. 한 시중은행 고위 임원은 "평가 막판에 은행은 B등급으로 분류했는데도 금융당국이 C등급을 매기라고 요구하면서 마찰이 자주 벌어졌다"며 "감독당국이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경우 책임을 진다는 각서를 내라'고 요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문제가 된 대선건설의 경우 시공능력 순위가 1672위로 이번 구조조정 대상에 포함된 것 자체가 난센스라는 지적도 있다. 금융권 여신이 500억원을 넘긴 하지만 은행이 나서서 퇴출을 결정할 정도의 '체급'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에 C등급을 받은 성우종합건설은 결과 발표 이전에 이미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을 신청했으며,D등급을 받은 금광기업은 법정관리를 신청한 지 2개월이 훨씬 넘었다.

숫자 채우기식 구조조정 아니냐는 지적에 금융감독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일부 부작용을 침소봉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평행선 달리는 현대그룹-외환은행재무구조 개선약정 체결을 둘러싼 현대그룹과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 간 갈등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은 현대그룹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이었으며 재무구조 평가 과정에서도 해운경기 상승과 현대상선의 실적 호전 등을 완전히 무시하고 불합리한 약정 체결을 강요했다"며 "대출금을 모두 갚고 주채권은행을 변경해 다시 평가받겠다"고 말했다.

현대그룹의 거부로 약정체결이 무산되자 채권단은 체결 시한을 7일까지 연장해줬다. 지난달 15일과 25일에 이어 세 번째 연장이다. 채권단은 이번에도 약정을 맺지 않으면 신규대출 금지와 만기연장 거부 등의 제재조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지만 현대그룹은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업과 은행의 갈등이 빚어지는 이유가 과거 지표로 미래를 판단해야 하는 신용평가의 특성 때문이라며 평가방식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한 기업구조조정 전문가는 "기계적인 잣대보다는 미래가치를 반영하는 평가방식이 유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부에서는 은행들이 기업들에 반론 기회를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구조조정 대상으로 낙인 찍는 풍토도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태훈/이정선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