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인물탐구 -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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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몇억으로 80억 병원 인수한 34살 외과 닥터신종플루가 확산 조짐을 보이던 지난해 9월 초.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정동의 관동대 명지병원은 3박4일 밤샘작업 끝에 16개 병상과 진료실,진단검사 장비 등을 별도로 갖춘 신종플루대응진료센터를 전국에서 가장 먼저 열었다.
부도위기 병원을 명품으로…'병원 살리는 의사'
대다수 대학병원이 신종플루가 원내 감염되는 것을 우려해 천막이나 컨테이너 박스를 진료시설로 활용하면서 미온적으로 대처한 것과 비교된다. 기온이 급강하하자 환자들은 추운 임시진료소에서 벌벌 떨었다. 반면 명지병원은 신종플루 환자 수가 정점에 달한 10월 말,편안한 실내에서 하루 1200명에 가까운 환자를 치료해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전재희 보건복지부 장관은 다른 유명 대학병원을 제쳐두고 명지병원의 모범적인 신종플루 대응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발빠른 대응을 독려한 이가 이왕준 관동대 명지병원 이사장 겸 의료원장(46)이다. "암이나 희귀 난치병에서 명지병원이 1등을 하는 것은 아직 요원합니다. 하지만 신종플루는 독감에 불과하니 열심히 하면 1등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종플루에 대한 선제적 대응으로 전국적인 명성과 고양시민의 신뢰를 한꺼번에 얻은 것 같습니다. "
이 이사장은 10여년 만에 맨손으로 두 개의 병원을 인수,경영 정상화를 이끌어 병원계의 '미다스 손'으로 불린다. 그는 운동권 의대생에서 병원 인수 · 합병(M&A) 전문가, 병원혁신 전도사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드라마는 없고 노력이 있을 뿐이다"는 그의 인생관에서 경영철학을 읽을 수 있다. ◆혜성처럼 등장한 병원경영의 마술사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법정관리를 밟던 진로그룹은 1998년 말 인천 주안동의 세광병원(당시 150병상)을 인수할 적임자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48억원의 부채를 떠안아야 하는 조건 때문에 인수자가 선뜻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서른네 살의 외과 전문의였던 이 이사장이 지인을 통해 이런 정보를 입수했다. 인수를 결심한 그는 48억원 부채 중 10억원은 나중에 갚겠다고 제약회사를 설득했으며,10억원은 임금채권을 승계하는 조건으로 해결했다. 남은 것은 28억원.진로는 부채를 완전히 털 수 있는지,채권자는 내 돈을 받을 수 있는지 서로 불신하는 터라 진전이 없었다. 결국 28억원을 댈 상호저축은행과 진로 측,채권자 등을 한자리에 모이게 해 각자 빚을 받고 저당을 푸는 방식으로 이 병원을 인수할 수 있었다. 6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땅값만 해도 64억원,자산가치가 80억원에 이르는 병원을 헐값에 얻게 된 것이다. 그가 들인 돈은 불과 수억원.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마련한 2억원과 어머니 명의의 서울 아파트를 상호저축은행에 담보로 제공한 게 투자액의 전부였다. 이 병원은 현재 57명의 전문의가 400병상을 운영하는 인천사랑병원으로 성장해 지역주민의 신뢰를 받고 있다. 이 이사장의 사업 수완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세광병원 인수는 시작일 뿐이었다. 인천사랑병원은 관동대의 주인인 명지학원이 명지건설 경영 부실로 위기에 놓이자 지난해 7월 수백억원의 부채를 떠안는 조건으로 명지병원(600병상)을 인수했다. 연 매출 300억원 규모의 인천사랑병원이 700억원 규모의 명지병원 경영을 맡게 되자 의료계에서는 '새우가 고래를 먹었다'고 평가했다. 이 이사장이 명지병원을 경영한 이후 반년 만에 1일 외래환자는 1600명 선에서 2000명 수준으로 늘었고,입원실 가동률은 87%에서 95% 선으로 올라갔다. 예전에 월 5억원 안팎 나던 적자는 현재 10억원 흑자로 돌아섰다. ◆무명병원을 명품병원으로
명지병원 인수 후 이 이사장은 과거 인천사랑병원 인수 시절과 마찬가지로 '100일 작전'에 들어갔다. 입원실 한 곳을 집무실로 만들어 침대와 책상을 갖다놓고 집에 들어가지 않은 채 경영 정상화 작업을 추진하고 나선 것.인수 후 열흘째 전 직원을 면담했고,30일째에는 외래진료시간 30분 앞당기기 및 원무수납 30분 연장하기,40일째에는 14개 업무 TFT 신설,70일째에는 신종플루대응진료센터 개소 등을 실행에 옮겼다. 드디어 100일째,적자가 흑자로 전환되면서 귀가할 수 있었다.
그는 무명 명지병원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시설과 인력을 확충하고 있다. 작년 11월 뇌졸중센터를 개설한 데 이어 올 3월에는 소화기센터,4월 임상시험센터와 신생아중환자실을 잇따라 열었다. 2012년에는 200병상 규모의 어린이병원을 지어 총 1000병상 규모로 키울 생각이다. 사람에 대한 투자도 이뤄지고 있다. 지난달 방사선중재수술 전문가인 권배주 서울대병원 교수를 영입한 데 이어 이달엔 허재학 상계백병원 흉부외과 교수를 모셔왔다. 그가 와서 교수진이 25% 교체됐고,10명이 순증했다. 이 이사장은 이름값만 보고 사람을 뽑지 않았다. 앞으로 10~20년 동안 진료현장에서 실제로 일할 인재를 끌어왔다.
이 이사장이 명지병원 인수 후 1년 가까이 보여준 행보에 직원들은 '개혁피로증후군'을 호소할 정도다. "제가 추진하는 경영혁신에 다들 죽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노동 강도가 절반도 안 올라갔어요. 전 각자 원칙대로 제 할일을 하자는 것이지 직원의 고혈을 짜낼 생각이 없습니다. 예컨대 틈나면 회진이라도 한 번 더 돌자고 말하지요. "
그는 남다른 원칙이 있다. 환자 수가 늘지 않는 의사를 질책하지만 매출액을 늘리라고는 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검사나 수술을 환자에게 강권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다른 병원처럼 매출을 늘린 의사에게 인센티브를 주지도 않는다. 장기적으로는 의사 간 위화감만 조성하고,환자에게 좋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돈벌이가 안 된다는 어린이병원 신설을 계획하는 것도 그의 진정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창의 경영…새 병원 성공 모델 만들터
이 이사장은 시대와 함께 고민하고 또한 고통받았던 '386세대'다. 1983년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그는 민주화라는 시대적 소명을 외면할 수 없었다. 민주화운동을 하다 보안당국에 검거돼 1986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6개월간 서대문 구치소에서 수감됐다가 1987년 6 · 29 선언이 나오면서 이듬해 복학할 수 있었다. "원래 뭐든 하면 대충하는 성격은 아니죠.의대 친구들은 1~2년간 학생운동을 하다가도 감방에 갈 정도로 위험하다 싶으면 도중 하차하는데 저는 비겁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어요. 그 당시 조직을 이끌며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과 절충점을 모색했던 경험이 오늘날 병원의 비전과 실천전략을 세우고 이를 강도 높게 실행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 자양분이 된 것 같습니다. "
1992년 6월에는 의대를 졸업하자마자 '청년의사'를 창간,의료계의 왜곡된 의사결정 구조를 비판하고 환자 중심의 의료문화를 만들자고 촉구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다져온 필력으로 기사를 직접 썼다. 대한의사협회장 직선제 쟁취는 언론활동을 통해 얻은 대표적 성과 중 하나다. 360여명의 의사가 십시일반으로 5000만원을 모아 만든 이 신문은 현재 유력 의료계 전문지로 자리잡았다. 그는 이런 이력 때문에 정치권으로부터 영입 요청을 자주 받지만 손을 젓는다. "민주화가 어느 정도 완성된 데다 정치가 소모적이라는 비난을 받는 터라 정치에 관심을 두진 않습니다. 오히려 의료계에서 창의적으로 벌일 만한 사업 아이디어가 너무 많습니다. " 그는 모험적인 자본 조달과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참신한 경영활동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병원 성공 사례를 보여주고 싶다는 말로 향후의 청사진을 요약했다.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