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정중한 거절의 뜻으로 받아달라" 재계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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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련 회장단 승지원 회동…이건희 회장 '묵묵부답'이건희 삼성 회장은 내내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이 15일 저녁 서울 한남동 승지원에서 열린 만찬에서 한목소리로 차기 회장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해왔음에도 끝내 침묵을 지켰다는 것.정병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예스(yes)도 아니고,노(no)도 아니었다"고 전했다.
삼성 관계자는 이 회장의 침묵에 대해 "정중한 거절의 뜻으로 해석해 달라"고 기자들에게 당부했다. 만찬 전부터 "이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을 수락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강조해왔던 것과 맥을 같이 하는 화법이었다. 반면 정 부회장은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명했다. 염화시중은 불교의 대표적인 화두 가운데 하나로 '말을 하지 않고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용어에는 이 회장이 전경련 회장단의 의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동시에 회장직 수락에 대한 가능성이 아직 살아 있다는 기대감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판단하기가 애매하다"재계 관계자는 "추대를 하는 전경련과 부담을 느끼는 삼성 측의 설명이 다소 엇갈리고 있다"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회장이 만장일치로 자신을 추대한 회장단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만찬 직후 한국경제신문 기자와 전화통화를 한 대기업 회장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는 이 회장이 내내 침묵을 지켰다는 정 부회장의 설명과 달리 "이 회장은 '지금 당장 대답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좀 더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 회장이 고사한 것으로 보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고사는 아니었지만…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 다시 "(이 회장의) 표정으로 봐서는 그저 인사치레로 검토하겠다고 한건지,아니면 진짜 생각을 좀 해보겠다고 한건지 시간이 좀 더 지나봐야 알 것 같다"고 애매한 상황을 전했다. 그는 자신이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만큼 기사에 실명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올림픽 유치 출장 15회 남았다"
이날 만찬에서 이준용 대림 회장이 가장 먼저 회장직 추대 제안을 했고 이후 모든 회장이 뒤따라 같은 제안을 했다. 이 회장은 "오늘 와 주셔서 고맙다. 경영활동을 하지 않았던 기간에 여러분들이 전경련을 이끌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말만 한 뒤 최대한 말을 아꼈다. 정 부회장은 추대 배경에 대해 "내년에 50주년을 맞는 전경련의 차기 회장은 4대 그룹에서 나와야 하고,고 이병철 전 삼성 회장이 초대 회장이었던 점 등을 감안해 이 회장이 맡아줬으면 한다는 뜻을 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회장의 침묵이 길어지자 이학수 삼성전자 고문(전 삼성 전략기획실장)이 참석한 총수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며 자리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율했다는 후문이다. 이 회장은 다만 참석 인사들에게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활동을 돕기 위해 올해에만 다섯 번,내년엔 열 번을 해외에 나가야 한다"는 계획을 공개한 것으로 전해졌다. 올림픽 유치에 전념해야 할 상황에서 전경련 회장직을 맡기 어려운 여건임을 우회적으로 표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차기 회장 인선 장기화할 듯
전경련 회장단은 이 회장이 즉답을 하지 않자 "아직 조석래 회장의 임기가 6~7개월 남아 있고 사표가 수리된 것도 아닌 만큼 전경련 회장 추대 문제는 조 회장의 치료 과정을 보면서 더 검토를 해보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에 따라 이번 달이 가기 전에 마무리 지으려 했던 차기 회장 추대 작업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게 재계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이 회장과 함께 유력한 추대 후보로 거론되는 정몽구 현대 · 기아자동차 회장도 이미 고사하겠다는 뜻을 강하게 밝힌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날 만찬에는 이 회장을 비롯해 최태원 SK,이준용 대림,김승연 한화,조양호 한진,박용현 두산,박영주 이건산업,현재현 동양,강덕수 STX,정준양 포스코,이웅열 코오롱,최용권 삼환,류진 풍산,김윤 삼양사 회장과 신동빈 롯데 부회장,정병철 상근부회장 등 전경련 회장단 대부분이 참석했다.
송형석/장창민/김현예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