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좋은 시험'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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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승복하는 테스트 드물어과외를 받지 않더라도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는 시험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시험이라면 학력평가나 대학 입학 등을 위한 조건으로 삼아도 안심할 수 있지 않을까. 과외없이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면 그동안 우리 교육문제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사교육비 부담을 크게 덜 수 있을 것이다. 시험결과가 공정 타당하고 신뢰성이 있다면 가난한 집이든 부잣집이든 그 결과에 승복하게 되지 않을까. 유수 학원들이 몰려 있는 서울 강남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학생들이 높은 성적을 거둘 수 있게 된다면 사교육비나 교육을 통한 부와 권력의 대물림 현상은 물론 부동산 투기과열이나 특정지역 가격앙등,주택문제 등 대부분의 한국병이 치유되거나 완화될 수 있을지 모른다.
권위·공신력 갖춘 잣대 만들길
장마와 무더위에 이 같은 천진난만한 일장춘몽식 상상이 짜증을 더하게 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의 교육문제를 생각할 때마다,그리고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지 반문할 때면 언제나 드는 의문이다. 좋은 시험,대다수가 그 결과에 승복하는 믿을 수 있는 시험이란 실현불가능한 것일까. 시험과 성적 위주의 교육이 가져온 폐단이나 그로 인해 발생하거나 악화된 것으로 의심되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들,전국적 수준에서 일률적으로 부과되는 학업성취도 평가로 인한 부작용이나 물의를 외면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좋은 시험이라면 자기 자식들이 치른다고 해서 시험지옥으로 내몰았다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이유는 없을 것이고 오히려 전쟁에 나갈 병사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자녀들이 살아가야 할 사회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만큼 격렬한 경쟁이 벌어지는 전장과도 같다. 인성교육을 강조하지만,법 없이도 살 수 있는 호인의 이미지나 도덕적 품성,휴머니즘보다는 공정한 경쟁과 결과에 대한 승복을 통해 성숙한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한때 내 인생에서 언제나 시험이 끝날지 헤아려 보던 시절이 있었다. 30대 중반까지도 시험은 끝나지 않았다. 또 무슨 시험을 치러야 하나 난감한 심정으로 시험장을 나서던 날의 고단한 기억이 새롭다. 교육전문가들이나 논객들이 입씨름을 벌이는 시험 말고도 무수히 많은 시험들이 있고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치른다.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입법고시,기술고시 같은 국가시험들,의사나 약사 등 각종 자격시험들,그리고 입사시험 같은 시험들은 간혹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국가 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를 위한 일제고사나 대학입시,수능시험처럼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일은 드물다. 그만큼 사람들이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관하는 학업성취도 국제비교 시험(PISA Test)의 결과는 그 측정방법과 결과의 의미 등에 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신뢰성 있는 성과 척도로 다루는 경향마저 나타난다.
사람들이 일생 동안 치르는 수많은 시험 중에는 나쁜 시험,수준이나 신뢰성이 떨어지는 시험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시험의 방법이나 내용,결과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 편이다. 우리는 왜 시험과 성적 위주의 교육제도만을 탓하고 좋은 시험,믿을 수 있는 시험 제도를 만들어 나가는 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까. 학업성취도 평가를 위한 일제고사나 대학입시 등 논란의 대상이 돼온 문제의 시험들을 '좋은 시험',과외나 치맛바람도 효과가 없는,누구나 그 결과에 승복하는 권위 있고 공신력 있는 시험으로 만들고,이를 통해 우리 아이들이 국내외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춰나가고 있는지 평가하고 개선해 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
홍준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