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어린시절 추억과 오버랩되는 모네ㆍ뭉크ㆍ칸딘스키…

아버지의 정원 | 정석범 지음 | 루비박스 | 200쪽 | 1만3000원
어린 시절과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었다. 좋건 나쁘건 그에 대한 기억은 갈수록 희미해지다가 언젠가는 지워질 위기에 처할 것이다. 그 일부분이라도 되살릴 수 있는 연결고리는 과연 없을까.

《아버지의 정원》을 쓴 저자가 고안해 낸 방법은 그 기억의 편린들을 명화 이미지와 겹쳐 놓고 단단한 '기억의 저장고'를 만드는 것이다. 저자는 작품의 설명을 돕기위해 그 때의 모습들을 단지 배경음악으로 깔았을 뿐 일지도 모른다. 명화 이미지와 어린시절의 추억.이 둘은 서로 껴안고 스며들어 색다른 경험을 불러 일으킨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 비행기 놀이기구를 타고 빙빙 돌면서 주변이 해체되고 색채가 혼합되는 순간을 경험한다. 이 때 칸딘스키의 추상화 '즉흥6-아프리카'를 접목시켜 사물이 구체적인 형상을 상실하고 추상적인 색채의 면들로 전환되는 순간을 포착해 알기쉽게 조목조목 설명해 나간다.

케테 콜비츠의 '죽음의 위로'는 그가 한탄강에 빠져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경험과 데칼코마니(어떤 무늬를 얇은 특수 종이에 찍은 뒤 다른 표면에 옮기는 회화기법)가 된다. 또 조르지오 데 키리코의 '거리의 우울과 불가사의'에 드러난 메타피지컬 이미지와 기하학적 긴장을 드러내기 위해 초등학교 시절 자신의 악몽을 떠올리기도 한다.

저자가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전곡 대구 원주 등으로 떠돌며 12세까지 겪었던 32개의 에피소드에는 모네,뭉크,마티스,프리다 칼로,칸딘스키와 김득신,안도 히로시게 등 익숙한 동 · 서양 화가들의 그림이 이처럼 시간차 없이 쓰윽 편입하게 된다. 이웃 장르인 연극 · 음악 · 영화 등에 관한 예술적 식견도 양념으로 곁들인다. 화가의 개인사와 시대상에 초점을 맞춘 여느 미술책에 식상한 독자라면 요리재료부터 다른 이 레시피에서 독특하고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전작 《어느 미술사가의 낭만적인 유럽문화 기행》이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 있는 저자에게도 이 책은 의미가 깊다. 유년의 정서적 씨앗을 뿌려 주었으나 지금은 고인이 된 아버지를 기억의 저장고에서 꺼내 반추하고 그로 인해 자기 마음의 텃밭에 풍성한 꽃들과 열매가 가득해졌으리니.

전장석 기자 sak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