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 명함 받으면 식은땀 흘리는 金대리

'漢盲 세대' 20~30代 사회 진출
국내외 비즈니스 현장서 '당황'
토익 900점인데 한자실력 최저
무역업체 영업사원 김만수 대리(32)는 명함을 주고받다 식은땀을 흘릴 때가 많다. 업무 특성상 40~50대 사장들을 주로 만나는데 이름을 한자로 적은 명함을 받을 때가 많기 때문.김 대리는 잽싸게 명함을 뒤집어 영어로 적힌 이름을 확인한 뒤 "아! 남승우 사장님!"을 외치는 식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서울 대치동에 사는 주부 정소미씨(34)는 최근 서예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여섯 살배기 딸의 질문 공세가 두렵다. 한문에 재미를 붙인 딸이 매일 두세 번씩 교재를 들고와 "엄마,이 한자는 뭐라고 읽는 거야?"라고 묻지만 정씨는 아는 한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1990년대 한자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현재 20~30대들이 사회에 본격 진출하면서 '한자 문맹 세대'의 폐해가 비즈니스 현장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서류나 명함에 한자가 조금만 섞여도 독음조차 못해 함께 일하는 부장급 간부들은 "어떻게 기본 한자도 못 읽느냐"며 답답해 한다. 대기업 인사팀에서 일하는 김동식 부장(41)은 "외부 미팅에서 부하 과장이 명함에 적힌 한자를 못 읽어 '반대편 저분 성함이 뭐죠?'라고 귓속말을 해왔다"며 "평소 일 잘하던 후배가 갑자기 실속 없는 사람처럼 달리 보이더라"고 말했다.

한자 공백 세대는 6차 교육과정(1992년 10월~1997년 12월)이 도입된 직후 학교를 다닌 이른바 '수능 세대'들이다. 그 전까지 필수교과였던 한문은 1990년대 한글전용론에 밀려 위상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노태우정부 시절 조완규 교육부 장관이 만든 6차 과정에서 선택과목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김영삼정부의 이명현 교육부 장관이 준비하고 김대중정부 당시 이해찬 장관이 시행한 7차 교육과정(1998년 1월~현재)에서 한문은 교과 재량 활동으로 축소됐다.

그래서 이때 중 · 고교를 다닌 세대는 한자를 제대로 못 배우고 졸업하는 일이 많았다. 일반고 출신 김동환씨(29)는 "고3 때 한문 과목은 있었지만 수능 과목도 아닌데 공부할 이유가 없었다"며 "학교에서 예상문제를 찍어주고 중간 · 기말고사를 치르는 식으로 한문 수업을 받았다"고 말했다. 외고와 과학고 같은 특수목적고는 더했다. 내신은 아예 포기하고 대입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아 교과 과정에 한문이 포함돼 있어도 그 시간에 다른 책을 펼쳐놓는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서울에서 외고를 졸업한 이지혜씨(31 · 여)는 "중 · 고교 때 한자를 거의 안 배웠는데 취업을 앞두고 뒤늦게 공부하느라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이씨는 "친구 중에 토익은 900점 이상이지만 한자는 빵점 수준인 친구가 많다"고 말했다.

우리말 어휘의 대부분이 한자어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어나 일본어를 배우는 데 있어서도 한자는 중요하다. 중국에 여행 가서 중국인과 수첩에 한자를 써가며 필담을 나눴다는 이야기는 한자를 모르는 세대에는 그야말로 '전설'이다.

특히 최근처럼 중국 비즈니스가 많은 시대에'東方航空(동방항공)'중 '航空'을 못 읽는 수준의 대리,과장급이 비일비재한 게 현실이다. 이 때문에 중국어를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직원들이 많다. 한 사교육업체의 일본어 강사는 "젊은 사람들이 한자를 몰라서 오히려 일본어를 읽고 쓰는 데 더 난감해 한다"고 전했다. 한자 공백 세대의 부실한 언어 능력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면서 최근에는 한자교육이 다시 주목받는 추세다.

김근회 홍운서예한문 부원장은 "요즘 대치동 부모들은 꼭 입시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휘력 향상이나 정서 함양 같은 효과에 주목해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한문 교육을 시키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강남 초등학교에선 2008년 10월부터 한자교육이 부활,900자가량의 기초한자를 가르친다. 일선 군부대에서도 제대를 앞둔 사병들에게 한자 자격증 취득을 독려,응시료를 지원하고 특강반을 운영하고 있다.

이현일/임현우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