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실적 좋아도 쉬쉬하는 기업들

"눈에 띄지 않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

국내 대기업 A사가 실적을 발표한 지난 28일 저녁.편집국으로 '희한한' 전화가 걸려왔다. 전년 동기에 비해 대폭 늘어난 '깜짝 실적'을 가급적 기사로 다루지 말아달라는 A사 관계자의 부탁이었다. 기업이 부진한 실적을 감춰달라는 경우는 종종 봤어도 개선된 실적을 빼달라는 부탁은 의외였기에 이유를 물어봤다. A사 관계자가 계면쩍어하며 털어놓은 사연은 이렇다. 최근 정부 국정운영 방향이 '친(親)서민'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대기업의 '사상 최대 실적'이 비난의 표적이 된 만큼 '장사 잘했다'는 보도가 부담스럽다는 것.안 그래도 장관들이 앞다퉈 '대기업들이 협력사 쥐어짜기로 좋은 실적을 거둔 것 아니냐'며 비난여론을 부추기는 마당에 괜히 긁어 부스럼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얘기였다. 그는 "요즘같이 '흉흉한' 분위기에 실적 좋다는 얘기가 나오면 여론의 뭇매를 맞기 십상이어서 일부러 보도자료도 안 냈다"고 귀띔했다.

6 · 2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한 뒤 정부의 정책기조가 확연히 바뀌면서 많은 대기업들이 '죄인' 취급을 받고 있다고 호소한다. B사 관계자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지만 과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심수습용'으로 대기업과 조직폭력배를 손보던 시절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국내 대표기업들의 활동무대는 비좁은 내수시장이 아니다. 글로벌 기업들과 세계 곳곳에서 치열한 경쟁 끝에 어렵사리 거둔 성과에 대해 칭찬과 격려는커녕 질책이 쏟아지는 게 현실이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어느 때보다 심각하고 대기업이 거둔 성과가 중소기업에도 흘러가도록 정책지원이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대기업=악(惡),중소기업=선(善)'이란 시각으로는 양극화를 해소할 수 없다. 서울 강남 집값을 잡겠다고 강남 대 비강남으로 '편'을 갈랐던 전 정부가 어떤 결과를 빚었는지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는가.

이명박 대통령은 29일 청와대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지만 정부가 인위적으로 나서는 데 한계가 있고 자칫 포퓰리즘으로 보일 수도 있다"고 선을 그었다. 이 말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왠지 개운치 않은 게 요즘 대기업들이다.

박민제 증권부 기자 pmj5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