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다시 보기] (13) 인클로저의 진실‥지주들의 욕심이 '규모의 경제' 이끌었다

英, 3차 인클로저로 근대적 땅 소유권 확립…생산성 증가
토지 잃은 농민 도시로 이주…노동자 늘어 산업화 뒷받침

영국의 인클로저(enclosure)는 세계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단어다. 그러나 '울타리를 둘러치는 것'을 뜻하는 이 단어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역사를 전공한 학자들 중에도 잘 모르는 사람이 있으니 그리 흠될 일도 아닌 듯하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뭘까. 똑같이 울타리를 둘러치는 일도 시대에 따라 그 형태와 역사적 의미가 달랐는데,이를 간과한 채 한꺼번에 뭉뚱그려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인클로저는 시대별로 세 종류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유토피아》에서 토머스 모어는 다음과 같이 썼다. '양은 원래 순하고 큰 비용 안 들이고 사육하던 동물인데,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금 이 양이 탐욕스럽고 거칠어져서 사람들까지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 시작했으며 농지,가옥,촌락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이 양을 먹는 것이 아니라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충격적인 표현 때문에 유명해진 이 구절은 15세기에 이뤄진 인클로저를 풍자하는 것이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14세기에 창궐한 흑사병으로 인해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자 엄청난 잉여 농작물이 발생했고 그 결과 값이 많이 내려갔다. 그러자 경작으로 수지를 맞출 수 없게 된 지주들이 농노나 소작인들을 내쫓고 경작지에 울타리를 둘러친 뒤 거기에다 양을 기르기 시작했다. 이같이 양을 기르기 위해 울타리를 둘러쳤던 것이 1차 인클로저였다.

1차 인클로저는 1516년 모어가 《유토피아》를 발표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절정기를 넘겼다. 16세기 들어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식량 생산의 수익성 또한 그만큼 빠르게 회복됐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에 걸쳐 다른 성격의 인클로저가 전개됐는데 대부분 종교개혁 이전 수도원 소유의 토지에서 이뤄졌다. 이른바 2차 인클로저로,이는 전환농법(convertible husbandry)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규모 토지에 울타리를 둘러치고 이를 다시 여러 구역으로 분리해 각기 목축지와 경작지로 활용했다. 그런 다음 몇 년 뒤에는 목축지를 경작지로,경작지를 목축지로 바꿔 사용한 것이다.

이런 방식은 토지의 효과적인 활용을 가져와 비약적인 생산성 향상을 기할 수 있었다. 16세기에 2배의 인구 증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접어들어 영국이 식량 수출국가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2차 인클로저의 힘 덕분이었다. 3차 인클로저는 18세기 후반에 일어났다. 1760년에서 1800년까지 진행된 인클로저는 그 직전 40년 사이 이뤄진 것의 10배에 달했으며 영향을 받은 면적은 약 300만에이커에 달했다. 이로써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면서 영국의 농업생산성은 비약적으로 향상됐다.

문제는 이 시기의 인클로저가 주로 공유지와 유휴지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이곳은 원래 농촌지역의 임금노동자들을 위한 안전핀 노릇을 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소규모 농작물을 재배하거나 가축을 놓아먹였다. 또 이곳에서 재목과 땔감을 구했으며 낚시와 사냥으로 식탁에 올릴 것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이 땅들이 인클로저라는 근대적인 소유권 확립 운동의 과녁이 되면서 문맹이거나 법적 지식이 없는 농민들이 소유권을 아예 부정당하거나 형편없는 몫을 받기 일쑤였다.

일제가 동양척식회사를 앞세워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권리 관계가 모호한 농민들의 토지를 몰수한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급성장을 이뤄낸 우리 경제는 후발자의 이점을 잘 살린 예로 꼽히고 있다. 농촌인구의 비중을 끌어내려 산업노동자들을 충분히 공급함으로써 성공적인 산업화를 뒷받침한 것도 마찬가지다.

차이가 있다면 19세기 영국의 인클로저는 지주들의 욕심에서 비롯됐을 뿐 그것이 산업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진행된 데 비해 20세기 우리는 의도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1960년 65%에 달하던 농림 어업 인구는 정부의 이농정책에 의해 30여년 만에 15%대로 줄어들었다. 그 산물이 서울 변두리의 달동네며 구로공단의 벌집이었다.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