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여행] 뭍에서 한뼘거리 섬에선…바람도 '한척의 배'가 된다

경남 창원(진해下)

호젓한 삼포로 가는 길을 너무 기대한 탓일까…아스팔트 위 어촌 낯설어
섬은 '격리'의 즐거움을 가르쳐 주는 곳 뒷산에서 불어온 솔바람이 마음의 짐을 싣고 떠난다

웅천지역은 조선시대 웅천현이 있던 곳이다. 웅천읍성을 찾는다. 1407년 현 남쪽 5리 지점의 제포를 개항한 뒤 무역을 빙자한 왜인의 불법이주가 늘어나자 거주민을 보호하려고 쌓은 성이다. 지금 동벽과 동문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옛 진해동중학교 자리에 들어선 진해예술촌 향토사료관으로 들어서자 농기구 · 부엌용구 · 의복 · 가구 · 악기 등의 민속자료가 객을 맞는다. 유리 없이 진열된 유물들의 질감이 더욱 생생하다. 내 눈길이 꽂힌 것은 복도에 놓인 꽃상여였다. 만장을 높이 들고 꽃상여를 뒤따르던 어린 시절엔 죽음조차 하나의 놀이였다. 예술촌 뒷골목의 '주기철목사순교비'가 있는 웅천교회로 향한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끝까지 거부하고 죽음으로써 신앙을 지킨 주기철 목사(1897~1944년)는 이곳에서 가까운 백일마을에서 태어났다. 웅천교회는 주 목사가 열세 살 때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고등학교 때 에스더서 4장16절을 제목으로 원용한 간증집 《죽으면 죽으리라》를 읽은 적이 있다. 순교비를 바라보자 그의 기도문 한 구절이 불쑥 떠올랐다. "당신이 제자의 발을 씻기셨으니 저는 문둥이의 발을 핥게 하여 주옵소서."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비상한 하심(下心)이다.



우리나라 모든 성(城)은 성소(聖所)그가 순교한 뜻이 이 땅에 오롯이 구현되길 바라며 남산(184m) 왜성으로 향한다. 산길을 굽이 돌아 성터에 이르렀다. 성터엔 성돌이 많이 남아있다. 허물어져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돌무더기를 바라보노라니 폐허가 지닌 처연한 아름다움이 가슴을 적신다. 사실 무질서를 허용하지 않는 경치란 얼마나 답답한가. 성돌 중엔 내 두 팔 길이보다 큰 암석도 있다. 이렇게 큰 돌을 어디서,어떻게 운반했을까. 곯은 배를 움켜쥔 채 혹독한 울력에 동원됐을 당시 민중의 고통을 짐작할 만하다.

우리나라 성(城)들은 민중의 고난이 서린 성소(聖所)다. 성안 여기저기에는 최초의 미사가 집전된 곳이라는 팻말이 꽂혀있다. 임진왜란 때 가토오 기요마사를 따라 종군했던 포르투갈 신부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가 이곳에 1년여 동안 머물면서 천주교를 전파했다는 이야기다.

꼭대기에 올라서자 제포항을 품은 제덕만과 그 주변의 수도 · 솔섬 · 연도 등은 물론 멀리 거제도까지 바라다보인다. 부산 가덕도와 거제를 잇는 거가대교도 웅자를 드러낸다. 소서행장이 이곳에 진을 친 것은 안골포 · 마산 · 가덕도 · 거제도와의 연락은 물론 여차하면 본국으로 철군하기에도 용이한 곳이라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웅천 도요지 사기장을 포함한 125명을 일본에 강제송환했던 '호모 비오랑스'(폭력적 인간)다. '바다를 제압한다'라는 뜻의 진해라는 지명이 고려 때부터 쓰였던 것을 고려하면 '바다(왜구)'가 얼마나 오래 전부터 골칫거리였나를 알 수 있다. 포크레인 몇 대가 매립 공사 중인 제덕만을 투구게처럼 기어가고 있다. 완공 후엔 복합관광레저단지를 조성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아,조선 세종 때 가장 먼저 개항했던 삼포왜관 중 하나인 제포항이 저렇게 사라져 가는구나.



가공의 지명이었더라면 좋았을 삼포 풍경
명동으로 가는 고갯길엔 '삼포로 가는 길' 노래비가 서 있다. 노래비 앞에 설치된 버튼을 누르자 노래가 흘러나온다. '아아 뜬구름 하나,삼포로 가거든/ 정든 님 소식 좀 전해주렴/ 나도 따라 삼포로 간다고/ 사랑도 이젠 소용없네/ 삼포로 나는 가야지.' 가수 강은철이 부른 이 노래는 따라부르기 쉽고 흥얼거리기 좋아 1980년대 초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작사 · 작곡한 이혜민씨는 고교 시절 여행길에서 우연히 찾은 삼포마을의 추억을 떠올리며 곡을 썼다고 한다. 당시의 삼포는 몇 채 안 되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한적한 어촌 마을이었을 것이다.

삼포가 여전히 호젓하고 한적한 마을이길 바라며 마을로 들어섰다. 그러나 나를 맞은 건 아스팔트 위에 횟집이 늘어선 현대화한 어촌이었다. 역시 이상향과 첫사랑이란 사이트는 함부로 클릭하지 않는 게 좋다. 공연히 로그인했다간 '안습'이다.

저 멀리서 해양공원(음지도)이 모습을 드러낸다. 음지교 부근에서 '군함전시관'인 강원함을 바라보는 것으로 해양공원 구경을 대신하고 우도행 배를 타러 갔다. 출항을 기다리는 동안 이상덕 선장에게 공사 중인 거가대교 얘기를 들었다. 길이 3.5㎞에 달하는 2개의 사장교,3.7㎞의 해저터널,1㎞의 육상터널로 이어지는 총연장 8.2㎞의 대공사다.

선장은 육안으로도 선명하게 바라다보이는 가덕도와 대죽도 · 중죽도 · 저도 등을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한다. 특히 침매공법으로 시행한다는 해저터널 공사 얘기가 흥미로웠다. 지상에서 침매함(터널 구조체)을 만들어 해저로 운반한 다음,미리 만든 트렌치(海溝)에 침매함을 설치한 뒤 묻어서 터널을 완성하는 공법이다. 올해 말 거가대교가 완공되면 현재 자동차로 3시간 이상 걸리는 부산~거제 간을 40분에 오갈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출항한 지 채 5분도 걸리지 않아 우도에 닿았다. 우도를 떠나는 낚시꾼들이 방파제에 늘어서서 배를 맞는다. 60여 세대가 사는 우도엔 방파제가 세 군데나 돼 낚시하기에 그만인 데다 감성돔 · 볼락 · 도다리 등이 잘 낚이기로 소문났다. 섬 뒤쪽의 백사장을 거닐었다.

때로는 바람도 한 척의 배인가,뒷산에서 불어온 솔바람이 내 마음의 무거운 짐들을 싣고 떠나간다. 섬은 '격리'의 즐거움을 가르쳐 주는 곳이다. 명동선착장에 회항한 배가 정박을 서두르는 사이 동섬을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뭍에서 손을 뻗치면 닿을 것처럼 가깝고 썰물 때면 걸어서 갈 수도 있는 이 섬을 끝까지 뭍에 편입하지 않은 조물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고유성 · 독자성은 상생의 기초

'k.엊그제 마 · 창 · 진 여행을 마침으로써 남해안 여정의 반환점을 돌았다네.통합 창원시가 된 이 지역을 여행하는 내내 나의 화두는 '통합은 절대선인가'였다네.우리가 세계화라는 거대담론에 처음 직면했을 때 그 흐름에 휩쓸려 혹 우리 민족의 고유성을 잃지 않을까 걱정했던 일 생각나는가? 어쩌면 이 통합을 '작은 세계화'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예전엔 작은 시골 마을에도 그들만의 고유한 풍물가락이 있었지.그러나 김덕수 사물놀이가 유행한 뒤로는 소박한 풍물가락들은 자생력을 잃고 사라져 버렸네.사물놀이가 풍물가락의 대중화 · 세계화에는 크게 기여했지만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폐해가 나타난 셈이지.마 · 창 · 진의 통합이 파이를 키우는 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고유성 · 독자성까지 아우르는 통합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일세.여독이 땅거미처럼 밀려오는 저녁이네.또 소식 전함세.'


안병기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