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재무구조 개선약정제 폐지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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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열사 도산위험 공유 사라져현대그룹과 주채권 은행인 외환은행 간에 재무구조 개선 약정 체결을 둘러싸고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문제가 되는 주채무 계열 재무구조 개선 약정이란 주채권은행이 대기업군에 대해 여신 중단 및 회수를 담보로 재무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각서를 체결하는 것이다. 이 제도는 외환위기가 일어난 이후에 도입됐다. 감독당국은 은행을 통한 대기업군 구조조정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획일평가·중복규제 부작용 커
이 제도가 외환위기 과정에서 도입된 근거는 당시 우리나라의 재벌로 불리던 대기업 그룹 기업들이 주로 상호 지급보증을 통해 도산위험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얽혀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계열사 중 한 기업이 부실화하면 상호 지급보증으로 다른 계열사들까지 동반 부실화하는 위험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대기업군 계열사 간 상호 지급보증은 외환위기 이후 전면 금지됐다. 이제는 재무 건전성이 좋은 기업이라고 하더라도 계열사에 대한 채무보증 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돼 있다. 따라서 하나의 계열기업군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도산위험을 공유하는 하나의 실체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제도 도입 및 유지의 근거가 사라진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의 재무구조 개선약정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재무구조 개선약정을 대기업군 단위로 체결한다는 것은 대기업군 소속 개별회사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금조달 비용 면에서 연대로 부정적 영향을 받게 한다. 아무리 개별 기업의 현금 흐름에 문제가 없더라도 그룹 전체가 주채권은행에 의해 재무구조 개선약정 대상이 되면 계열사들의 자금조달 금리를 연대적으로 인상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재무구조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약정이 오히려 계열사들의 재무구조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둘째, 재무구조개선 약정 제도가 대기업군 소속 기업들을 하나로 묶어 평가하다 보니 개별기업이 속하는 산업의 특성을 무시하고 획일적으로 평가하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현행 평가 방식에 따르면 대기업군 소속 기업들의 합산재무제표를 작성해 부채비율이 높은 경우 재무구조 약정 대상으로 분류한다. 산업에 따라 적정 부채 비율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단순 합산 재무제표 속에서는 개별기업이 속한 산업의 특성,특히 항공 해운업과 같이 부채 비율이 높은 거대 장치산업의 특성은 매몰돼 버려 정확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셋째,이 제도는 채무자인 기업 자체의 의사가 배제된 상태에서 사실상 일방적으로 선정,집행된다. 주채권은행에 의해 재무개선 약정체결 대상으로 결정되면 대상 기업군으로서는 신용평가 절차와 결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리고 당사자인 기업의 의사는 배제된 상태에서 여러 이해관계자 중 하나인 주채권은행이 다른 채권 은행들과 공동 여신 회수를 담보로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실시하는 제도이다. 이는 사실상 강제적으로 기업활동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제도이다.
넷째, 여신 규모 500억원 이상 개별기업의 경우에 대해서는 거의 유사한 절차와 내용으로 채권은행 기업신용위험상시평가 운영협약에 의해 상시평가제가 이미 운영되고 있다. 개별기업이 대기업군에 속한다고 해서 은행업감독규정에 의해 또다시 중복 운영해야 할 필요가 없다.
결론적으로 제도 도입의 기본 전제가 됐던 대기업군 소속기업들의 도산위험 공유위험이 사라진 상태에서 이 제도는 계열사들의 자금조달 비용 상승,획일적 평가에 따르는 산업 특성 무시,일방적이고 강제적인 구조조정에 따르는 기업활동의 자율성 침해,그리고 중복 과잉 규제 등의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으며 국제적으로도 이와 유사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이 제도는 이제 폐지돼야 할 때다.
최두열 한국기술교육대 교수·산업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