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디지털 치매

TV를 보던 할머니가 일어나려 하자 곁에 있던 할아버지가 부탁했다. "냉장고에 있는 우유를 갖다 주겠소? 잊어먹을지 모르니 종이에 적어 가구려." 할머니는 "내가 치매라도 걸린 줄 알아요? 걱정마세요"라고 했다. 잠시 후 할머니가 삶은 달걀을 그릇에 담아 오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고맙소.그런데 소금은 왜 안 가져왔소?" 인터넷에 떠도는 치매 유머다.

치매는 기억력 저장 창고인 수백억개의 뇌 신경세포 뉴런이 서서히 죽어가면서 생기는 노인성 질병이다. 뇌기능을 손상시키는 질환 모두가 원인이 된다. 이런 노인성 치매와 달리 10~30대 젊은이들에게 주로 찾아오는 치매가 있다. 컴퓨터 휴대전화 PDA 내비게이션 등 디지털 기기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나타나는 '디지털 치매'다. 기본적 사항에 대한 기억이나 간단한 계산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서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현상이다. 한 취업 포털 사이트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니 60% 이상이 디지털 치매를 경험했다고 한다. 증상은 어떨까. 일본 고노 임상의학연구소는 7가지를 제시한다. 집 · 회사 이외의 전화번호는 기억나지 않는다. 주변 사람과 대화의 80% 이상을 이메일로 한다. 전날 먹은 식사 메뉴가 생각나지 않는다. 글씨를 거의 쓰지 않는다. 처음 만났다고 생각한 사람이 사실은 전에 만났던 적이 있다. '왜 같은 얘기를 자꾸 하느냐'는 지적을 받는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단 뒤 지도를 보지 않는다 등이다.

디지털 치매가 바로 노인성 치매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고 하지만 그리 안심할 일도 아니다. 신경과학자 마이클 머츠니히는 날로 늘어나는 인터넷과 정보기기 사용이 우리의 두뇌 구조를 바꿀 수도 있다고 섬뜩한 주장을 한다. 디지털 기기 과다 사용으로 인한 주의력 분산과 사고 단절이 인간 지적능력에 장기적으로 치명적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치매를 막으려면 좋아하는 노래 가사와 중요한 전화번호를 의도적으로 외우고,신문이나 책을 매일 한두 시간씩 정독하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메모,일기쓰기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도 글쓰기의 발달을 탄식한 적이 있다. 머리에 생각을 담아두는 대신 기록에 의존하게 되면 기억력과 사고력이 감퇴할 것이란 우려에서다. 이젠 디지털 기기가 기억을 대신하는 시대가 됐다. 갈수록 인간 사고가 얄팍해지고,살아가는 방식도 더 경박해질까 봐 걱정이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