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이란 중앙은행 통해 수출입 차액만 결제

청산계좌로 기업지원 추진

수출입은행에 맡기는 방안도…교역금지품목은 철저히 배제
미국의 이란 제재로 불거진 국내기업의 대(對)이란 교역 중단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카드로 양국 중앙은행 간 청산결제 제도를 도입하는 방안이 등장했다. 이란과 교역하는 국내기업은 그동안 국내 시중은행,유럽계 은행 등을 통해 자금 지급 및 수령,송금,신용장 거래 등의 금융거래를 해 왔다. 하지만 지난달부터 유럽계 및 국내 시중은행이 이를 중단하면서 이란과의 금융거래와 교역이 중단된 상태다. 청산결제 방식이 도입되면 이란과 교역관계를 재개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방안이 성사되려면 두 개의 큰 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미국의 동의를 이끌어 내고 청산계정에 포함시킬 품목과 거래 한도를 이란 정부와 합의해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


◆청산결제 어떻게 운용되나

청산결제 제도는 국가 간 교역에서 거래가 생길 때마다 결제를 하지 않고 양국이 지정한 청산계좌에 수출액과 수입액을 적어 놓았다가 일정 기간(통상 1년) 뒤 차액만을 결제하는 제도를 말한다. 한 · 이란 중앙은행 간 청산결제 제도가 시행되면 한국은행과 이란 중앙은행에 각각 청산계좌(청산계정)가 마련된다. 이란에 매달 100만달러어치를 수출하는 A업체는 수출 사실을 한은에 알리고 매달 100만달러를 찾는다. 반대로 이란으로부터 분기에 300만달러어치의 원유를 수입하는 B기업은 분기에 한 번씩 거래 사실을 통보하고 한은에 300만달러를 입금하면 된다. A은행은 한은으로부터 마이너스통장을 쓰는 것이고 B기업은 예금계좌를 두고 있는 것과 같다. 이란 중앙은행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국 기업들과 자금을 주고받는다.

한은과 이란 중앙은행은 1년 뒤 주고받을 돈을 계산한 뒤 1년간 거래를 청산한다. 금융계 관계자는 "민간은행의 거래가 막혀 있는 상황에서 기업의 자금거래를 계속 지원하려면 현실적으로 이 방안 외 대안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은행들은 이에 따라 최근 회의를 열어 이 같은 방안을 도입하자고 정부 및 한은에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은이나 이란 중앙은행의 지점이 적어 기업들의 불편이 예상되는 만큼 양국 중앙은행은 대행은행을 위탁해 운용할 수도 있다. 금융계 관계자들은 중앙은행을 통한 청산결제가 여의치 않다면 양국 수출입은행을 통한 방식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북한과 합의 전례 있어

남한과 북한은 2000년대 들어 경제협력을 확대하기 위해 청산결제 제도를 도입하는 방안을 협의,2004년 합의서에 가서명까지 했다. 청산결제은행은 남한의 경우 수출입은행,북한은 조선무역은행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2007년까지 청산계정에 포함시킬 품목에 대한 추가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견해차는 '전략물자'에서 발생했다. 전략물자란 대량살상무기로 전용될 수 있는 물품을 지칭한다. 일부 품목에 대해 "전략물자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남한과 "대상이 아니다"라는 북한의 시각차가 맞서면서 협상은 중단됐다. 수출입은행 관계자는 "2004년 당시 남북한 간 최종 합의가 이뤄지면 지점이 많은 시중은행을 대행은행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했었다"고 말했다. 청산결제 제도는 독일 통일 전 서독과 동독이 무역거래를 위해 사용한 적이 있으며,1960년대 한국과 일본이 활용하기도 했다.

◆미국 설득이 분수령

한국과 이란이 큰 틀에서 이 제도의 도입에 합의한다 하더라도 남북한처럼 세부사항에 대해 이견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한 관계자는 "이란이 수입을 강력히 원하는 품목에 대해 한국이 전략물자에 해당한다고 하면 합의점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가능성은 낮지만 결제리스크를 고려해 거래의 양과 금액의 한도를 정하게 되는데 절충점을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생길 수 있다. 미국은 강력한 이란 제재방침을 천명하고 있다. 사실상 이란의 고립을 도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만의 '예외'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란 수출금지품목이 아닌 품목만 거래하겠다고 해도 '예외'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한국이 북한 제재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이어서 한국 정부가 말을 꺼내기도 쉽지 않을 수 있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과거 남북한 간 청산결제에 합의했을 때 미국이 문제 삼지 않았었다"며 "테러나 자금세탁 등 미국이 금지하고 있는 품목을 청산계좌에서 철저히 배제하면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이 방식으로 이란과의 정상적인 교역관계를 도모하는 국가가 나온다면 한국의 부담도 줄어 들 수 있다"고 진단했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