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태풍피해 전한 조선시대 상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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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고충 우선해결 왕에게 직언유난스러운 무더위가 물러나려나 했더니 태풍이 왔다. 8호 태풍 '곤파스'가 닥친 2일 새벽 6시 반 나는 엘리베이터를 내려 아파트 입구에 섰다. 하지만 비에 흠뻑 젖은 앞 뜰에는 온갖 것들이 강풍에 흩날렸고,족히 한 길은 됨직한 쇠붙이 같은 것도 눈에 띄었다. 외출을 포기하고 나는 집으로 올라왔다.
공직자 본분은 국민 안위에 있어
전철이 서고,수많은 가구에 전기가 끊겼으며,나무가 쓰러져 희생자가 났다. 21세기 한국의 피해에 비하면,옛날에는 태풍 피해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아직 지금처럼 정교한 과학문명이 없으니 피해도 소박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치자면 우리 조상들에게 태풍 피해는 오히려 지금보다 컸을 것이다. 이번처럼 여름 끝무렵의 태풍도 많았다. 세종 때만 예를 들어도 1425년 7월23일 경상도에 태풍이 불어서 나무가 뽑히고 벼가 상했으며,병선(兵船) 26척이 부서졌다. 1440년 8월3일에는 큰 바람에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았다. 양력 8월 말 9월 초의 일이다. 이런 태풍 피해 기록이 《삼국사기》《고려사》《조선왕조실록》에 부지기수다.
인조 때인 1630년 추석 전날 함경도의 11곳에 태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고,연일 폭우가 쏟아져 벼가 물에 잠겼다. 5년 뒤 1635년 7월25일 예조참판 정온(1569~1641)의 상소문은 당대의 《인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모두 상세히 남아있다.
'태풍으로 기와가 날고 종묘의 아름드리 나무가 뿌리 뽑혔다. 논밭의 곡식과 목화에 미친 피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결실한 것은 모두 떨어졌고,줄기는 꺾였으며,목화는 열매를 맺었건 말았건 모두 손상되었다'는 피해상황을 예로 들며 정온의 상소문은 시작한다. 그는 이 상소를 올려 당시 진행 중이던 토지조사를 중지할 것도 건의했다. 흉년 드는 해에 백성의 원망 살 일을 벌이지 말라는 주장이었다. 인조는 그의 건의를 유념하겠다고 응답했다. 이 상소문을 올린 정온은 기억할 만한 선비다. 벼슬로 치면 그는 이조참판,지금으로 치면 차관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1641년 6월21일자 《인조실록》에는 그의 졸기(卒記)가 남아 있다. 죽은 날 그의 인물평이 '실록'에 남았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역사적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그는 1614년(광해 6년) 영창대군을 옹호하다 제주로 유배됐고,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났다. '천성이 꾸밈 없고 곧으며 과감히 말하는 큰 절개'를 칭찬한 이 인물평은 또 그가 병자호란 때 강화를 극력 배격한 척화론자였음을 지적했다. 인조가 삼전도에 나가 청에 항복하자 그는 칼로 배를 찔러 자결하려 했으나 급히 구조돼 죽지는 않았다. 꼭 100년 전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자결한 여러 선현들을 떠올려 준다. 지금 그의 고향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에는 생가가 보존돼 있고(중요민속자료 205호),제주도에서 그는 '제주오현'의 한 사람으로 올라 있다.
병자호란 한 해 전에 그가 태풍을 맞아 올린 상소문은 왕이 공구수성(恐懼修省 · 하늘을 두려워하고 수양하며 반성한다)하면 재이(災異)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당시로서는 상투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대단히 비과학적이다. 임금이 공구수성한다고 태풍이 오지 않을 이치가 없을 터이니….그렇기는 하지만 지금도 나라를 맡아 운영하는 사람들이 공구수성한다면 재해의 피해는 줄일 수 있다. 임금이 하늘을 두려워하듯,오늘의 정치인이 국민을 두려워한다면 말이다. 작금의 사태만 보더라도 21세기 한국의 지도층이 얼마나 국민 앞에 안하무인인지 알 수가 있다. 8호에 이어 9호 태풍 '말로'가 한반도로 북진 중이라는 소식을 들으며 특히 공직자들의 '현대적 공구수성'을 촉구한다.
박성래 < 한국외대 과학사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