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전 인물열전] (17) 여상(呂尙)‥72세에 立身한 낚시꾼…'경제우선' 정치로 천하를 낚다

우리나라와는 가장 가까워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까지 들렸다는 제나라는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북부 지역. 당시 강력한 진(晉)나라에 못지않은 요충지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기름진 땅이 2000리나 되고,상업과 공업에 어업과 염업까지 성한 강대국이었다. 그런 나라의 초석을 다진 자는 여상이었다.

주나라 초기의 공신으로 우리에게는 강태공(姜太公)으로 더 알려진 그는 문왕의 스승이었다가 다시 그의 아들 무왕을 도와 은나라의 주왕을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웠으며 그 공으로 제나라 제후가 된 인물이다. 사마천의 《사기》 '제태공세가'에 의하면 그의 성은 강씨지만 봉해진 성을 좇아 여상(呂尙)이라고 한 것이다. 여상은 너무도 궁핍하여 나이 72세에 낚시를 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주나라 서백(西伯)이 사냥하러 온다는 것을 알고 나라를 다스리는 책략에 대해 생각해 두었다. 서백이 사냥을 나가기 전에 점을 쳐보니 점쟁이의 말이 "용도 아니고 이무기도 아니며 호랑이도 아니고 곰도 아니니,사로잡을 것은 패왕을 보좌할 신하일 것"이라고 했다. 이에 서백은 기쁜 마음으로 사냥에 나섰다. 위수(渭水) 북쪽까지 사냥하러 갔는데 마침 한가롭게 낚시하는 태공을 만나자 서백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선왕 태공(문왕의 부친 계력을 말함)께서 '성인이 주(周)나라에 나타날 때가 되면 주나라는 그로 인해 흥성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선생이 정녕 (그 성인이) 맞습니까?."

이에 그를 '태공망(태공의 바람이란 뜻)'이라고 일컬으며 수레를 타고 함께 돌아와 국정을 관장하는 국사(國師)로 삼았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사마천은 이런 이야기를 덧붙였다. 여상이 나오게 된 경위가 주나라 서백이 유리라는 곳에 갇히게 되자,평소부터 친분이 있던 산의생과 굉요의 추천으로 초빙됐고 초빙될 때 한 말이 서백이 어르신을 잘 공경한다는 것 때문에 기꺼이 응했다는 것이다. 여상은 서백이 정치를 공정하게 하는 것을 도왔으며 서백이 우(虞)나라와 예(芮)나라의 송사를 단번에 해결하도록 곁에서 보좌해 당시 사람들이 서백을 "천명을 받은 문왕(文王)"이라고 일컫게 만들었다. 사마천은 여상이 나라를 부유하게 한 일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 "부녀자들에게 길쌈을 장려하여 기술을 높이고,각지로 생선과 소금을 유통시키자 사람과 물건이 돌아오고 줄을 지어 잇달아 모여들었다"(화식 열전)고 기록했다.

서백이 강태공을 국사로 삼고 나서 제나라가 세워지고 흥성하면서 춘추전국시대의 핵심국가로 나아가게 된 것은 재상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깨워 주기에 족하다.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는 명언을 남긴 관중처럼 다양한 일자리 창출과 국가 경영전략으로 백성들을 잘 살게 해 주고 제나라를 강국으로 발전시킨 것은 오늘 이 시점에도 유효한 국가경영전략이어야 한다. 현실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공정사회란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현실이 꼭 그렇지는 않은 것도 사실 아닌가? 총리 후보자가 압축되고 하마평이 무성하다. 엥겔지수가 최고치에 달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진정한 경제총리가 임명됐으면 하는 바람이 절실해지는 오늘이다. 물론 도덕적 흠결이 없어야 하는 자기관리는 기본 전제다.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wjkim@konyang.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