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이념 과잉의 시대

중도실용을 기치로 내건 이명박 정부에서도 이념의 과잉은 여전하다.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경제개발이냐 민주주의냐,성장이냐 분배냐를 따졌던 예전의 이념 논쟁과는 차원이 다르긴 하다. 하지만 친서민이나 상생,공정 등 최근에 떠오른 화두들 역시 '개념을 제시하고 이를 잣대로 세상을 들여다보려는 경향성'은 과거와 다를 게 없다. 세세한 부분까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오히려 더하다.

가치를 앞세우는 접근법은 근본적으로 한쪽의 진실만 대변한다. 예컨대 상생을 과도하게 추구하면 '자유'가 훼손된다. 10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은 영화 아바타와 시장에서 외면받는 영화들의 상생 문제를 생각해보자.영화관을 찾은 관객 10명 중 두세 명에게 인기없는 영화표를 사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이 있겠지만,보고 싶은 영화를 찾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근본적으로 침해한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소비자들은 G마켓이나 인터파크와 같은 오픈 마켓을 통해 멀리 떨어진 곳에서 파는 물건들을 비교하고,정보를 교류하면서 상품을 고를 수 있게 됐다. 제품의 미세한 차이를 부각시키는 고객들의 예리한 품평에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애플이나 모토로라 등 내로라하는 국내외 대기업들조차 혼쭐이 난다. 경쟁력이 없는 동네 가게들이야 말할 나위가 없다. 시장참가자들의 선택이 예리해질수록 승자의 과실이 커지는 반면 패배자들이 많아져 사회는 양극화된다. 양극화 해소와 상생을 위해 인터넷 검색 범위를 '동네'로 제한하는 등의 행위는 소비자들의 선택권과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좋은 부품을 값싸게 공급하는 업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납품단가를 낮추는 것은 대기업 구매담당자들의 임무다. 시장에서 정하는 가격이 아닌 '특정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한 가격'으로 거래하라는 것은 구매담당자들에게 배임을 하라는 얘기다. 이런 식으로 결정되는 가격은 투명하지도 않다. 단기적으로 대 · 중소기업이 상생하는 것처럼 보일 뿐,실제로는 공멸로 가는 지름길일 수 있다. 시장은 부품을 인위적으로 높은 가격에 매입하는 기업을 살려둘 만큼 한가한 곳이 아니다.

외교통상부에서 발생한 '장관 자녀 특채'는 문제투성이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모든 고위공직자들에게 공정의 잣대를 들이대며 자녀 취업을 까보겠다는 주장은 마녀사냥식 여론재판이다. 고위공직자와 그 자녀에게도 인권이 있고,무수한 땀방울이 그들의 삶에 녹아있다. 저신용자들만 값싸게 돈을 빌려쓰는 미소금융,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해 그린벨트 위에 짓는 보금자리 주택,대형 슈퍼마켓의 진입을 제한하는 법안 등도 마찬가지다.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온 정책과 제도들을 공정이라는 하나의 잣대로만 들여다본다면 잘못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모든 가능성에 문을 열어둔 복잡다단하고 유기적인 사회에서 기업과 개인의 행동을 재단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할수록,자유롭고 창의적인 활동은 위축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망했고,마오쩌뚱이 지배했던 중국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 처참하게 실패한 이유다. 그래서 중국은 30여년 전 "우리의 영혼을 구속하는 족쇄를 벗어던지자"(덩샤오핑,1978년)며 현실의 세계로 뛰쳐나와 질주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관념의 잣대를 오히려 강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현승윤 경제부장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