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증권 창립 40돌‥해외사무소 개설ㆍ스팩 상장…40년 발자취마다 '업계 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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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동양증권으로 출발"산업입국(産業立國)을 위해서는 기업의 자금조달 여건을 개선해야 합니다. 증권회사를 키워 자본시장 육성에 기여합시다. "
73년 '대우가족' 으로 합류
83년 社名 '대우증권' 으로
99년 대우그룹서 분리…
수익ㆍ자기자본ㆍ시총 1위
증권시장 강자로 우뚝
1970년 9월23일 서울 원효로1가 일성신약 본사.윤병강 일성신약 사장(현 회장)을 포함한 7명의 발기인이 모여 증권사 창립총회를 열었다. 당시 국내 경제는 제조업을 중심으로 고도 성장의 기틀을 닦고 있었지만,안정적인 투자재원 조달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평소 증권사 설립 필요성을 느끼던 이들은 납입 자본금 5000만원을 마련해 의기투합했다. 회사명은 동양증권㈜으로 정했다. 명동 로얄호텔 맞은편에 본점을 두고 영업을 시작한 동양증권은 27번째 증권사로 뒤늦게 출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 이 회사는 아시아 자본시장을 넘보는 국내 1위 증권사로 성장했다. 바로 대우증권이다. 지난 40년간 대우증권이 남긴 발자취에는 '국내 최초''업계 최초' 기록이 적지 않다. 그러나 성장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대우증권이 걸어온 길에는 한국 금융업이 거쳐온 영욕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국내 27번째 증권사로 출발
동양증권 출범 당시 국내 증시는 태동기였다. 상장사는 48개,거래종목은 63개에 불과했다. 이런 시장을 27개 증권사가 덤벼들어 혼전을 벌였다. 야심차게 도전장을 내민 동양증권은 첫 회계연도부터 자본금의 11%에 달하는 순이익을 내며 순조롭게 출발했다. 당시 업계 평균 자본금이 4490만원에 불과해 동양증권은 '새내기'임에도 중견 회사들과 어깨를 견줬다. 1973년 정부가 증권거래법을 개정해 증권사의 자본금 규모에 따라 유통업무와 발행업무를 나누면서 동양증권은 새 국면을 맞게 된다. 증권사들은 증자에 나서느라 애썼지만 증시가 침체에 빠져 여의치 않았다. 동양증권 경영진은 회사 규모를 키우기 위해선 자금력이 탄탄한 새로운 주주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때마침 수출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사세(社勢)를 키워가던 대우그룹이 금융업에 진출하기 위해 후보를 물색하던 때였다. 양측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인수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해 9월1일 동양증권은 '대우가족'으로 합류하며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았다.
◆'개인투자자를 위한 주식투자 설명회' 첫선
대우의 지원사격을 받은 동양증권은 승승장구했다. 불과 6개월 새 4억원을 증자해 자본금을 5억원대로 불렸다. 곧이어 진양화학 서울식품 백화양조 아세아시멘트 등 기업공개(IPO)와 구주 매출을 잇달아 성사시켜 IPO부문에서 선두로 부상했다. 1975년 5월엔 본사와 부산지점에서 업계 최초로 개인투자자를 위한 주식투자 설명회를 열어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직장,모임 등에서 요청이 들어오면 직원들이 슬라이드기를 들고 출장설명회를 갈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이어 9월엔 IPO를 단행하고 증권시장에 입성했다. 1970년대 성장의 기반을 닦은 동양증권은 1983년 10월 대우증권으로 간판을 바꿔달고 가속페달을 밟았다. 그해 12월 업계 수위를 다투던 삼보증권을 흡수 · 합병하면서 명실상부한 국내 1위 증권회사로 등극했다.
1980년대 주가 상승과 함께 대우증권은 굵직한 성과를 이뤄내며 맹활약했다. 1984년 8월 업계 최초의 해외사무소를 일본 도쿄에 개설했다. 현재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강창희 소장이 초대 도쿄사무소장을 맡았다. 그는 "당시 일본 연수 중 사무소장을 맡아 1989년 2월까지 도쿄에서 일했다"며 "한국 증시제도가 일본을 주로 참고한 데다 1980년대 일본 경제가 고성장을 질주하던 때여서 도쿄사무소의 역할이 컸다"고 회고했다. 국내 증시에 투자하는 첫 해외펀드인 '코리아펀드'를 뉴욕증시에 상장하는 쾌거를 이룬 것도 이때다. 대우증권은 1984년 8월 미국 퍼스트보스턴과 공동 주관으로 6000만달러 규모의 공모에 성공했다. 주당 공모가가 12달러였던 코리아펀드 주가는 1년 만에 122달러까지 치솟았다. 그해 12월 대우증권은 명동시대를 마감하고 여의도 신축 사옥으로 이전해 '여의도 시대'를 열었다.
◆해외경영 1기 시대를 열다1989년 코스피지수가 처음으로 1000포인트를 찍을 때까지 대우증권의 질주는 파죽지세였다. 1986년 증권사 중 처음으로 연간 주식약정 1조원을 돌파한 데 이어 1986년엔 2조원,1988년엔 10조원을 차례로 뚫었다. 1989년 4월1일 코스피지수가 1007.77을 기록하며 1000포인트를 돌파하자 주식 열풍은 절정에 달했다. 그해 대우증권은 연간 주식약정 20조원을 돌파해 증시 역사에 새 기록을 세웠다. 1990년엔 업계 최초로 트레이딩룸을 설치,자기자본투자(PI) 수준도 업그레이드했다.
1990년대 들어선 대우그룹의 '세계경영'에 발맞춰 해외진출에 속도를 냈다. 헝가리 합자은행(1990년),런던 현지법인(1991년),뉴욕 현지법인(1992년),마자르대우증권(헝가리 · 1993년),마자르대우리스(1994년),홍콩 현지법인(1995년),루마니아대우은행,우즈베크대우은행,싱가포르 현지법인(1997년) 등을 잇따라 설립했다. 하지만 1998년 대우그룹이 자금난에 빠지면서 대우증권은 최대 위기를 맞았다. 1998년 10월29일 '대우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노무라증권의 보고서가 발표되면서 대우그룹은 사실상 해체수순을 밟았다. 결국 1999년 8월 채권은행단이 지분을 인수하면서 대우증권은 대우그룹에서 완전 분리됐다.
◆되찾은 전통의 명가
2000년 5월 산업은행이 대우증권의 최대 주주로 바뀌면서 변신이 시작됐다. 조직 슬림화와 함께 종합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투자은행(IB)으로의 변신을 기치로 내걸었다. 2005년 8월 자산관리 잔액이 10조원을 넘어선 데 이어 2007년 10월 20조원,지난 4월에는 40조원을 차례로 돌파했다. 지난 3월 첫 상장된 1호 스팩(SPAC · 기업인수목적회사)도 대우증권의 몫이었다. 업계 최고 수준의 이익을 지켜낸 끝에 1999년 대우사태 때 'CCC'까지 추락했던 신용등급은 'AA'로 올라섰다. 대우그룹 위기로 주춤했던 해외경영에 다시 시동을 걸기 시작,중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시장으로 시야를 넓히며 진출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박해영 기자 bon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