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멘스의 베팅…임금인상 대신 '평생고용'

獨근로자 12만명 '해고 금지'
금속노조와 합의했지만 2013년까지만 협약 유효
전문가들 "실효성 의문"
독일 최대 전자기기 업체 지멘스가 독일 내 자사 근로자들의 평생고용을 보장키로 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멘스가 독일 내 근로자를 해고하지 않기로 지멘스 노사협의회 및 독일 금속노조(IG메탈)와 합의했다고 23일 보도했다. 지멘스는 독일에서만 12만8000명을 고용하고 있다. 지멘스의 조치는 고용보장이 일반적인 유럽에서도 이례적이다. 다임러 자동차가 공장 근로자들에게 최소 10년 근속을 보장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하겐 레쉬 쾰른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이와 유사한 조치를 본 적이 없을 만큼 생소하다"고 말했다.

이번 합의는 2008년 지멘스가 노사협의회,IG메탈과 맺은 고용보장 협약을 2013년까지 연장하기로 한 것이다. 지멘스는 올해까지 한시적인 고용보장 협약을 2008년 말에 맺었다. 지멘스는 실질적인 '평생직장'으로 유명했으나 2008년 이후 지멘스AG에서 약 1만9000명을 구조조정했고 최근에도 소프트웨어 계열사인 지멘스SIS 등을 분사시키기로 결정,노조와 충돌을 빚어왔다. 이에 고용보장을 요구하는 지멘스 근로자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져왔다. 페터 뢰셔 지멘스 최고경영자(CEO)는 "경영환경이 허락하는 한 독일 내 지멘스 근로자들을 해고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합의는 최근 거세지는 임금 인상 요구를 막기 위한 것으로도 풀이된다. 지멘스가 임금을 인상하지 않는 대신 고용을 보장키로 했다는 분석이다. 지멘스를 비롯한 독일 기업들은 최근 몇 년간 글로벌 금융위기,수출 대상국 소비 둔화 등의 이유를 들어 노조에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토록 설득해왔다. 노조도 임금 인상보다는 일자리를 보장받는 데 주력했다. 독일 노동계는 추가 임금 지급 없이 1인당 근로시간을 늘리는 등 인력을 유연하게 운용하는 데 동의했지만 최근 들어 경제 회복세를 이유로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독일의 지난 2분기 국내총생산(GDP)은 1분기보다 2.2% 증가,1991년 통일 이후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연율로 환산하면 9%에 달한다. 실업률도 14개월 연속 하락해 1992년 이후 최저인 7.6%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에 지난해 2.0% 임금 인상과 350유로(약 53만원)의 일시 보너스 지급안에 합의했던 IG메탈은 최근 6% 임금 인상안을 제시했다.

유럽연합(EU) 평균에 못 미치는 낮은 평균임금 상승률도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독일 민간부문 노동자 임금은 2000년 초부터 지난 1분기까지 총 21.8% 상승했다. EU 평균 35.5%에 비해 낮다. 한스 뵈클러 경제연구소의 통계에 따르면 독일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2000년에서 2008년 사이 0.8%포인트 떨어졌고 2009년에는 0.2%포인트 더 떨어졌다. 독일 정부도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를 지지하고 있다.

우줄라 폰 데어 라이엔 독일 노동장관은 "경기 회복에 따른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AP통신은 "지멘스 측의 일자리 보장은 임금 인상폭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노사 간 고용보장 합의에 대해 "실효성이 없다"며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조치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 이번 합의가 2013년 이후 고용보장을 끝낼 수도 있다는 단서조항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레쉬 연구원은 "고용을 보장하게 되면 임금 인상 요구에 대처하기 어려워진다"며 "지멘스가 2013년 고용보장에 대한 입장을 바꾸면 즉시 노조의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