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화 기행] (21) 무어인 물러난 알람브라 궁전…아라비아 왕국의 榮華만 남아

(21) 스페인 그라나다

회교도 지배 받은 유럽 속 이슬람 도시
벽·천장 장식한 기하학적 문양 타일…정교한 세공 눈길
지금 무대 위에선 기타의 거장 페페 로메로가 타레가의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주하고 있다. 잔잔히 떨리면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트레몰로 주법'의 선율이 청중의 귀에 애잔한 여운을 남기며 사라진다. 뿐만 아니다. 기타 줄을 튕기는 거장의 다섯 손가락은 미풍에 살포시 떠는 부챗살 같은 시각적 파장을 남긴다. 그 파장은 청중의 탄식의 다리를 건너 어느새 내 가슴으로 날아와 마음 속 깊이 감동의 물수제비를 일으킨다. 순간 눈앞에 오랜 옛날 알람브라 궁전에 터를 잡고 그라나다를 호령했던 아라비아 왕국의 영화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여느 도시들이 그렇듯 오늘의 그라나다는 아직도 무어인(스페인의 아랍인 호칭)의 자취를 잔뜩 머금고 있다. 새하얀 벽에 붉은색 지붕을 인 건물들은 회교도 지배의 오랜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기원전 5세기 로마의 식민지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던 이 도시는 8세기 회교도의 수중에 들어가 800여년간 지배를 받게 된다. 13세기에 가톨릭 세력과의 전투에서 패한 회교도들이 이곳으로 후퇴해 건설한 그라나다 왕국에서 비롯된 도시.이후 나스리드 왕조의 그라나다 왕국 수도로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며 아랍의 정치 · 경제 · 문화 중심지로 군림하게 된다. 그러나 250여년간 지속된 이 이슬람 왕국은 1492년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를 주도한 페르디난드 2세와 이사벨라 여왕에게 정복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라나다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도시의 남동쪽 언덕에 자리한 알람브라 궁전이다. 시내 중심의 왕실예배당에서 누에바광장을 거쳐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는 이 궁전은 붉은색 흙으로 지어졌다 해서 '빨강'을 뜻하는 '알람브라'라 이름 붙여졌다. 원래는 무어인 병사들의 방어용 성채였는데 13세기 전반부터 보수 · 확장에 들어가 14세기 후반 유세프 1세와 무하메드 5세 치세에 이르러 오늘의 모습으로 완성됐다. 마지막 왕인 보압딜이 눈물을 흘리며 떠날 때까지 무어족 왕들의 정치적 공간이자 사생활 공간이었다.

알람브라 궁전은 회교,유대교,기독교 건축 양식이 한데 결합된 이른바 무데하르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나스르 궁전,카를로스 5세 궁전,알카사바,헤네랄리페 등 4구역으로 나눠진다. 이 중 나스르 궁전은 왕이 정치를 행하던 곳으로 메수아르의 방은 왕의 집무실이었다. 이 방의 벽면과 천장은 온통 아라비아 특유의 기하학적 문양 타일과 아라비아 문자가 새겨진 정교한 석회 세공으로 장식돼 있어 그 화려함이 방문자의 탄성을 자아낸다.

형상의 재현을 금기시한 아라비아 율법에 따라야 했던 장인들은 같은 시대 서방세계에선 상상할 수 없었던 추상예술의 정점을 넘나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볼 수 있는 모습은 기독교 시대에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왕의 사적 공간이자 왕실 여인들이 거주하던 할렘은 124개의 정교한 장식 기둥으로 둘러싸인 사자의 중정 부근에 있다. 나스르 궁전 옆의 카를로스 5세 궁전은 그 자리에 있던 무데하르 양식의 겨울궁전을 철거하고 지은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으로 완성을 보진 못했다. 헤네랄리페는 14세기 초에 조성된 여름궁전으로 나스르 궁전에서 동쪽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나타난다. 이곳에는 원래 무어인들이 장미와 오렌지,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는 관목인 도금양을 심어 이국적인 운치가 느껴진다. 군데군데 눈에 띄는 느릅나무는 1812년 영국의 웰링턴 공작이 가져와 심은 것이다.

여름궁전이었던 만큼 청량한 느낌을 자아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수로와 분수가 많아 물의 궁전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특히 '아세키아의 중정'에는 정원 한가운데에 길쭉한 수로를 설치하고 좌우에서 가늘게 물을 뿜어내게 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사뭇 정겹다. 그 낭만적인 풍경 사이로 간간이 들리는 나이팅게일 새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이곳이 마치 지상낙원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 아름다운 무어인의 궁전은 한때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그라나다를 수중에 넣은 후 기독교 왕들은 알람브라를 자신들의 임시별궁으로 잠깐씩 사용했다. 그때마다 개 · 보수가 이뤄져 알람브라의 원형은 심각하게 훼손됐다. 18세기 전반 필리페 5세가 잠시 사용한 이후로 궁전은 사실상 방치됐다. 나중엔 갈 곳 없는 걸인들과 노상강도들의 은신처가 돼버렸다. 나폴레옹 전쟁 때는 프랑스 군의 막사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들은 1812년 궁전을 떠날 때 이곳의 방어기능을 마비시키기 위해 지뢰를 터뜨리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여러 개의 망루가 잿더미로 변했다고 한다. 알람브라가 옛 모습을 되찾게 된 데에는 건축가 호세 콘트레라스의 공을 잊을 수 없다. 그는 1828년 공사에 착수해 3대에 걸쳐 복원공사에 힘을 쏟았다.

잊혀졌던 알람브라의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서방세계에 알린 이는 19세기 미국의 문호 워싱턴 어빙이었다. 마드리드에서 잠시 외교관으로 일했던 그는 궁전의 복원공사가 막 시작된 1929년 봄 이곳을 처음 본 순간 무어인이 이룩한 찬란한 문화와 깊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를 계기로 그는 알람브라와 그라나다에 전해오는 무어인에 얽힌 민담과 역사기록들을 조사하는 데 팔을 걷어붙인다. 그로부터 3년 후 어빙은 《알람브라 이야기》를 출간,알람브라의 역사적 · 예술적 진가를 일깨우고 이의 보존을 촉구한다. 그의 노력에 화답해 스페인 정부는 알람브라의 복원과 보존에 발벗고 나섰다고 한다.

어빙이 그라나다를 방문한 지 100년 후 멕시코의 작곡가 아구스틴 라라도 이 매력적인 무어인의 도시를 방문했다. 그가 느낀 감동은 어빙의 그것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1932년 그는 이 도시를 보고 느낀 감흥을 '그라나다' 라는 노래에 실었다. 낭만적 정서로 충만된 노랫말 때문일까. 이 곡은 20세기 대중음악 사상 가장 많이 리바이벌됐다. 그라나다의 매력,아니 알람브라의 매력을 이만큼 깊고 진하게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저녁 일몰은 한낮의 그라나다에 탄식으로 작별을 고하네/ 그것은 이 도시가 누렸던 옛 영화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 흔적은 내가 돌아다닌 언덕 주변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네…. 난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 쌓인 눈의 홍조 띤 얼굴을 질투하네/ 그것은 곧 별들을 맞는다는 설렘 때문이지/ 그 사이 수천 개의 기타는 부드러운 코비네타를 연주하겠지/ 그러면 달빛 어린 그라나다는 낭만적이고 황홀한 옛 영화를 우리 눈앞에 재현한다네.'(아구스틴 라라 작사 · 작곡,도로시 도드의 영문 번안가사 중에서)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


◆ '폭군' 보압딜의 진실어느 왕조건 마지막 왕은 폭군이다. 아니 폭군으로 묘사된다. 하(夏)나라 마지막 임금이었던 걸왕(桀王),은(殷)나라 마지막 임금이었던 주왕(紂王)처럼 알람브라 궁전의 마지막 주인공이었던 보압딜도 19세기 초까지 폭군으로 묘사됐다. 그는 자신의 왕비를 근거 없이 의심해 재판에 회부했고,홧김에 누이와 두 아이를 살해했으며,용맹한 아벤세라헤 가문 사람들을 잔인하게 참수했다.

과연 그랬던 것일까? 워싱턴 어빙은 <<알람브라 이야기>>를 통해 이런 세간의 평가에 반기를 든다. 그는 알람브라에 머무르는 동안 진실을 캐기에 온 힘을 쏟는다. 결론은 보압딜은 무죄라는 것이었다. 그는 당대의 문서와 역사기록을 샅샅이 뒤졌지만 보압딜의 만행을 입증할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다며 오해의 씨앗은 <<그라나다의 내전>>이라는 사이비 역사서가 뿌린 것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스페인어로 간행된 이 책은 이후 여러 언어로 번역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보압딜은 씻을 수 없는 죄인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배후에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자리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기독교도로서 무어인의 역사적 누명을 벗기는 데 앞장섰던 그는 영락없는 로맨티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