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대학 교육의 혁신이 親서민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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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정책이 美 유학 부추겨1980년대 우리나라 중산층의 아이콘은 일제 밥솥이었다. 중산층 가정 주부들은 앞다퉈 밥솥을 사들였다. 공항 입국장에서는 밥솥 상자를 든 여행자들의 긴 줄이 진풍경을 연출했다. 하지만 오늘날 주변에서 일제 밥솥을 찾기란 쉽지 않다. 국산이 가격과 성능 면에서 일제를 앞질렀기 때문이다. 국산 밥솥이 대역전 드라마를 연출해 낸 것이다.
예산 증액·구조개편 나설 때
2000년대 들어 새로운 트렌드가 일제 밥솥의 자리를 차지했다. 외국 조기유학이 중산층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반미 감정이 유달리 강한 386세대 부부까지도 우리 대학을 외면한다. 아이들을 미국행 비행기에 태워 보낸다. 그 결과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에 따르면 2009년 현재 한국 대학 유학생들은 약 12만명에 달하게 됐다. 우리보다 인구가 20배 이상 많은 인도나 중국 국적 유학생보다 많은 숫자다. 정부의 대학 예산 정책은 이러한 추세를 부추기고 있다. 내년도 고등교육 예산은 실망스럽기만 하다. 전체 교육 예산은 늘었다. 예산은 2010년 예산보다 8% 많은 41조3000억원으로 책정됐다. 하지만 고등 교육 예산은 올해와 비슷한 5조5000억원에 머물렀다. 전년도 예산보다 줄어든 2009년이나 2010년 예산에 비하면 일보 전진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물가상승률을 고려한다면 뒷걸음질친 셈이다. 대학 교육의 질적 혁신이 또 한번 국정 우선 순위에서 밀려난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대학 교육 혁신은 진정한 의미의 친서민 정책이다.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공교육 개선,저소득층 학비 지원과 특별 전형 제도 등은 서민층 자녀들의 대학 입학에만 도움을 줄 뿐이다. 졸업 후 취업을 못해 빈곤의 늪에 빠지는 것을 막아줄 수는 없다. 이와 관련,교육의 질적 혁신은 양질의 직장 취직을 도와줄 것이다. 졸업생 3명 중 1명의 발목을 잡는 청년 실업 문제를 완화하고 개천에서 용이 나올 가능성을 높여줄 수 있다.
교육 혁신은 우리 경제의 도약에도 필수 불가결하다. 우리나라에서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 세계적인 혁신 기업을 이끌어가는 20,30대 최고경영자가 등장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대학교육 때문이다. 대학교육은 우리나라 기업들의 두통거리이기도 하다. 녹색산업과 생명공학,그리고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 등 차세대 먹을거리 사업에 진출하고 싶어도 능력 있는 졸업생들을 찾을 수 없다고 하소연이다. 물론 대규모 예산을 편성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예산 증액은 정부의 재정 운영 방침에 무리를 줄 수 있다. 정부는 2014년 재정 흑자 전환을 목표로 허리띠 졸라매기에 들어간 상태다. 진학자 숫자 감소도 고민거리다. 저출산 현상이 계속됨에 따라 2023년부터는 고교 졸업자가 대학입학정원보다 무려 20만명가량 부족할 것으로 추산된다. 따라서 잘못하다가는 학생이 없어 문을 닫아야 할 대학에 지원을 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교육의 질적 혁신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전 세계는 재정 압박에도 불구하고 대학 구조 개편과 함께 예산 증액을 통해 혁신을 꾀하고 있다. 핀란드는 올해 1월 거액의 예산으로 헬싱키 경제대,예술 및 디자인대,그리고 공대를 합쳐 알토 (Aalto) 대학을 설립했다. 프랑스도 세계 10대 대학 육성 계획을 세우고 대학들을 통폐합하는 한편 2012년까지 고등 교육 예산을 50% 증액하기로 했다. 일본 역시 2020년까지 추진하기로 한 신성장 전략을 통해 대학 교육 개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계적인 추세에 발맞추기 위해서라도 구조 개편과 함께 과감한 예산 집행을 통한 대학 교육 혁신이 시급한 것이다. 정부 관계자들의 발상의 전환을 기대해 본다. 국산 밥솥의 역전 드라마가 대학 교육에서도 재현되기를 고대한다.
윤계섭 < 서울대명예교수·경영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