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 기축통화국의 미필적 고의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통화가치를 낮추려는 '환율전쟁'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환율전쟁은 자칫 보호무역주의 확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 입장에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역국 간 경제적 이익을 취하기 위한 통화절하 경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1930년대 경험한 바 있다.

최근 환율을 둘러싼 갈등은 미국의 티모시 가이트너 장관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위안화 절상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점을 들어 중국 때리기에 나서면서 시작됐다. 매년 있는 일인데,올해는 중간 선거를 염두에 둔 탓인지 유독 수사(레토릭)가 좀 강했을 뿐이라는 해석도 있다. 다시 하원에서 중국 수입품에 징벌적 관세를 추가로 부과할 수 있는 '공정 무역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키면서 환율 문제가 정치 이슈화됐다. 위안화를 급속히 절상하면 파산 기업이 늘고 실업자가 쏟아져 나올 것이란 중국 측 항변도 논리가 다소 강하긴 해도 어느 정도 예상된 반발이었다. 사실 무대 뒤에서 미 · 중 정책 당국자들 간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도 오랜 시간이 걸려야 풀까 말까 한 일을 공론화하면서 시끄럽게 된 측면도 있다.

마침 미 · 중 간 신경전 와중에 일본이 엔화 가치 급등을 막기 위해 대규모로 외환시장 개입에 나서면서 세계 '빅 3'가 환율 전쟁에 돌입한 것으로 비쳐졌다. 여기에 선진국의 뭉칫돈들이 금리가 상대적으로 높으면서 탄력적인 경제 성장세를 타고 있는 신흥국 채권시장에 유입되면서 신흥국 통화가치가 급등하는 현상이 빚어졌다. 채권 금리가 두 자리인 브라질이 대표적이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특이한 점은 환율 다툼이 확산되면서 미국에서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추가 양적완화조치가 지탄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장기적으로 미국이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국가 채무 부담을 덜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관측도 없지 않다. 각국의 통화당국자들은 약(弱) 달러가 지속되는 가운데 자국 통화가치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를 고민 중이다. FRB의 추가 조치는 돈을 풀어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자극하고 수요를 회복시켜 고용활성화를 꾀하려는 취지다. 당초 약 달러를 유도해 제조업체 수출을 지원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추가 양적완화 조치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FRB 통화정책의 순수성이 의심받고 있다. FRB 자체 분석모델에 따르면 FRB가 5000억달러의 국채를 매입하면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이 0.15%포인트 떨어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국내총생산(GDP)은 0.2% 증가하고 실업률은 0.2%포인트 감소하는 정도다. 투입된 돈에 비하면 효과가 약하다.

양적완화 조치의 부작용은 벌써부터 뚜렷하게 나타난다. 최근 금값 등 국제 상품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외환시장 변동성이 커졌다. 그렇다고 미국이 처한 정치 · 경제적 상황을 염두에 두면 FRB가 팔짱을 끼고 있을 수만도 없다. 당파성이 심화된 탓에 재정정책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유일한 안전판은 FRB 밖에 없기 때문이다. 벤 버냉키 FRB 의장의 말마따나 통화정책 한바퀴로만 미국 경제가 온전히 굴러갈 수 없다. 외바퀴에 의존한 미국 경제가 살아나야만 환율 긴장이 해소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당장 깔끔한 해법을 찾기 어려워보인다.

뉴욕=이익원 특파원 iklee@hankyung.com